구조한 길고양이 일기

15. 닥쳐올 파도를 유연히 탈 것이다

by Young





거짓말처럼 평온한 며칠을 보냈다. 생각을 달리 먹고 난 뒤부터이다. 너무 애쓰지도 않고 너무 걱정도 하지 않는다.일단 그냥 오늘, 다시 오지 않을 하루에 감사하기로 했다. 후회도 자책도 분노도 멈추었다.


나만 기분 좋은 나날일수도 있다. 라운이는 여전히 날 쳐다보지도 않고 어쩌다가 라운이 얼굴을 볼때면 모든걸 잃어버린 우울한 고양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 두려움에 절고 외로움에 절어 있는 얼굴. 흠칫 마음도 아프지만 이내 섭섭함이 더 크다. 나는 이렇게 너에게 마음을 주는데 넌 어찌 그리도 날 못된 사람 쳐다보듯이 하냐.


어제는 점심 시간에 극장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혼자 보는 영화였다. 미팅도 일찍 끝내고 나섰다. 어깨에 힘을 바짝 주고 걱정 고민에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려 결국 일도 제대로 못하고 앓아가던 날들.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을것이다. 세상엔 내 컨트롤대로 내 생각대로 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냥 마음을 굳건히 먹고 가능하다면 여유도 가지면서 닥쳐올 파도를 맞서지 않고 유연히 탈 것이다. 그냥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


라운이와 나에겐 시간이 많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이게 라운이에게 못할짓을 하는건가. 아이가 행복해 하면 그런 생각을 안할텐데 여전히 구석에 박혀 우울하게만 있는것 같아 마음 한쪽이 계속 좋지 않다. 그나마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아이가 비워놓은 빈 그릇, 잘 먹고 잘 쌌다는 화장실 안에 감자, 내 침대 위에 올라가 그루밍을 한 흔적, 그리고 푹 잘때 내는 코고는 소리이다. 좋은 캣타워 위에 올라가 볕을 맞고 광합성 하고, 푹신한 쿠션 위에서 두 발 뻗어자고, 종이 스크레치를 박박 긁는 모습은 아직 꿈만 꾼다.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이의 속도가 중요할 것이다.


나는 시간이 없다고 했다.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현실적으로 나는 장소도 시간도 없다. 내가 방사를 고민 했고, 마음을 방사쪽으로 두었을때 처음에는 해방감이 들었으나 이내 그만 두었다. 아이는 원치 않은데 내가 억지로 잡아서 왔다. 아이는 힘들게 여기에 적응하려고 했을것이다. 내가 작업실 문을 여닫을때 그리고 환기 삼아 문을 열어둘때마다 라운이는 한번도 튀어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퇴근하고 나올때도 환기를 위해서 창문 높은쪽에는 열어놓고 가지만 아이는 매일 여기에 있다. 라운이는 이 곳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이젠 억지로 다시 내보내는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책임을 져야겠다.



예술인 전세자금대출을 알아보았다. 라운이 때문에 시작된 일이지만 작업실 겸 내 생활공간이 생긴다면 나에게도 정말 좋은 일이다. 라운이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생각도 하지 않았을것이다.


오늘 밤도 라운이가 놓아둔 밥과 약을 잘 먹고 물도 잘 마시며, 작은 물레방아 돌아가는 풍경과 소리 들으면서 외로워하지 않길. 그루밍도 실컷하고 모니터 영상에서 나오는 새 영상을 아무 생각 없이 시청하면서 쉬길.




라운이 작업실 오고 초반이다. 내가 병원 데려가려고 무리하게 다시 잡기 전.(정말 매일이 후회스럽다). 아이는 내 앞에도 나오고 밥도 먹었었다.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면 다시 이렇게 나와줄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내가 개인적으로 갖고싶었던거긴하지만, 라운이를 위해서 심심할까봐 물레방아 하나를 설치해줬다. 당근마켓에서 마침 만팔천원에 물레방아와 펌프 매물이 나왔었다. 살뜰하게 삼천원 네고까지 하고 다이소 들러 유리 어항을 오천원주고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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