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권 정도 읽었거든용
폰을 보며 길을 걷고 있었다.
폰으로 뭘 보고 있었더라.
그때 갑자기 어떤 남성분이 말을 걸어왔다.
키도 크고 멀쩡하게 생긴, 내 또래의 남성.
“혹시 서면 쪽에 독립서점 아는 곳 있어요?”
하.. 다른 걸 물어봤으면 못 들은 척 지나갔을 텐데.
하필 내가 책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고.
독립서점을 묻다니!!
옛날에 서면에서 칼국수 맛집을 물어보던 사람들 떠올랐다.
진심을 다해 고민해서 알려주면 꼭 이상한 종교를 전도하려는 얘기를 꺼내서, 내 ‘맛집에 대한 진심’이 여러 번 짓밟혔었다.
아무튼, 서점 얘기에 신나서 당장 생각나는 곳을 알려줬다.
오바스러운 손짓까지 하며 “전포라면 저쪽에 ‘크레타’ 검색해서 가시면 돼요!”
근데… 눈빛이.
찜찜해서 바로 자리를 뜨려는데 그가 말했다.
“아 그런데 직업을 선택할 때 앉아서 하는 일 말고, 간호사나 강사처럼 움직이는 직업을 선택하세요.”
속으로 Shit.. 역시나.
“아.. 네..” 하고 돌아서는데 또 붙잡았다.
“생각이 너무 많아요. 앉아서 일하는 직업을 택하면 힘들어요!”
괜히 지기 싫었다.
“아, 근데 저 이미 사무직 6년 차라 직업 바꿀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앉아 있으면 힘들 텐데? 생각도 많고?”
오호라. 대화를 좀 해보자 이건가?
딱히 바쁜 것도 아니라서, 오랜만에 사이비랑 대화를 좀 해볼까 싶었다.
게다가 800권 독서력의 ‘말빨’ 테스트도 좀 해보고 싶었다.
그는 친근하게 반존대를 하며 말했다.
“남자 사주예요. 남자를 만날 땐 잡고 살아야 잘 살아요. 그리고 성질 더러워. 남자 사주라 그래.”
사주 볼 때마다 듣던 말인데?
“오, 또요?”
무료 사주라니 개이득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내 띠를 물었다.
나는 갑자기 신이 나서
“띠도 맞춰보세요!”라고 했지만
“무당은 아니라서 그건 못 맞춰요.”
라고..
내가 돼지띠라고 하자
“음 95년생~”
이라고 하는데 순간 07년생으로도 안 봐준 게 약간 서운했다.
(지금 생각하니 나 참 양심이 없다.)
그러더니 자신이 대***교에서 공부 중이라고 순순히 밝혔다.
네이버에 대***교를 검색하면 사이비라고 뜬다.
대***교에 안 좋은 기억이 있던 나는 바로 물었다.
“신이 있다고 믿으세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에 나오는 “나의 신은 요절했다.”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구다.)
그는 신은 없지만 조상은 믿는다고 했다.
그러자 나는 지지 않고 말했다.
“조상을 믿으면 귀신 있는 거잖아요!”
그가 말했다.
“그럼 무당이 왜 있겠어요?”
… 앞뒤가 안 맞잖아요?
갑자기 또 사주 보듯 말했다.
“그쪽, 소화기관 안 좋죠?”
맞긴 하다. 나는 위가 약하다.
그는 소화 잘되는 음식 먹으라며 건강까지 걱정해 줬다.
얼굴도 멀쩡하고 키도 크고, 스스로 사이비임을 밝히고, 직업 선택에 대한 조언부터 내 건강까지 걱정해 주니. 오랜만에 세상의 따뜻함을 느꼈달까..
이젠 내가 그를 대***교에서 탈출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한껏 진심을 실어 말했다.
“왜 대***교 공부하세요? 생긴 것도 멀쩡하신데 아까워요. 대***교 이미지 안 좋은 거 아시죠? 제 친구가 옛날에 끌려갔다가 제사비 돈 30만 원 내라고 했다더라고요. 화났어요 정말. 아니, 제 걱정 말고 본인부터 거기서 벗어나요! 혹시 돈도 내셨어요? 설마? 그리고 신은 없다면서 조상은 믿어요? 조상신도 신인데? 제발 그 힘으로 다른 공부 하세요. 얘기하다 보니 안광이 생기셨어요! 처음에 저한테 길 물어보실 때 안광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방향만 바꾸면 진짜 큰일 하실 것 같아요. 너무 아까워요.”
그가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
“음… 제가 공부한다고 고생을 좀 하는데… 저기 카페에서 이야기할 겸 커피를 사주실… 생각은 없으시겠죠…?”
커피 얻어먹기 시전 하려다 내 말에 질렸는지 말끝을 흐렸다.
“네! 당연하죠! 저 먹을 돈도 없는데 어떻게 사드려요. 요즘 제가 좀 쪼들리는 편이라. 그래도 얘기 재미있었어요. 다 맞추신 것도 너무 신기했구요! 그리고 신은 없어요. 조상신도 없어요. 우리하기 나름이에요. 꼭 거기서 벗어나서 큰일 하세요! 응원합니다! 아자아자!! “
라고 하자 그는 묘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며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내가 알려준 독립서점은 그쪽이 아닌데…
아무튼 800권 읽으면 사이비도 물리친다.
직접적인 책 이야기는 안 했지만 오늘의 이 승리는 독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대화에 여유가 생겼달까?
그리고 내 무신론 전도가… 먹혔기를..
혹시 그분이 이 글을 본다면
부디 벗어나 멋진 길 걸으시길 바란다.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