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12월 20일
오랜만에 책을 두어권 펼쳤다. 다 읽었다시피 본 것들은 없었지만, 펼침만으로 좋은 경험들을 주는 책들이었다. 라틴어 수업은 인간은 영원으로부터 와서 유한을 살다 영원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책 뒤표지에 소개된 본문 내용에 끌려 가지고 온 책이었는데, 도통 책상에 올려놓아만 두고 며칠간 진도를 빼지 못했다. 오늘 다시 한 편을 읽으면서, 그래 매일 한 강의씩 읽자라는 마음을 먹었다.
길게 읽지 못했지만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도 좋았다. 우선 첫 도입부부터 매우 헤세스러우면서 그 헤세스러움 덕인지 읽는데 실망감보다는 깊게 한 개인의 자아속에 빠져드는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질문으로 가득한 지문들에도 나는 쉽게 빠져든다.
그래 이제는 연락이 올 정도가 되었으리라, 하는 시기에 사측에서 메일이 왔고 나는 내일로 방문날짜를 정할 수 있었다. 희망연봉 수준 이라는 말이 조금은 걸리지만, 그렇다고 내가 뭐라고 연봉을 조정을 할 사람은 되지 않는다 여긴다. 어찌됬든 계약서에 필요한 서명들을 하고, 그 계약에 충실하게 나는 내가 가능한 노동을 하고, 회사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1월부터 시작되는 근무. 이제 내게는 약 10여일의 시간이 남아있다.
그동안 꿈을 많이 꿨다. 무엇이 그렇게 불편했길래 꿈을 꾸게끔 만든건지는 잘 모르겠다. 단골로 나오는 대학 수업 꿈도 나오고, 다수의 적군을 앞에두고 최후를 앞두고 있는 병사의 꿈을 꾸기도 했다. 절박함이 코 앞에 있었다. 내 손에는 수류탄이 쥐어진 듯 했다. 상황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나는 문득 다시 세상을 경험했다.
널럴한 시간중에 다시 즐겁게 하고싶은 일을 찾아 로모카메라를 열심히 찍고 다녔었는데, 오늘 현상을 하고나니 배터리가 다 달은 덕에 셔터는 열린채로 나는 사진만 찍어댄 꼴이었고, 하얀 필름만이 내가 받아볼 수 있는 전부였다. 대전에서 올라오는 중에는 나름 재밌는 촬영을, 담아가고 싶은 풍경을 꽤나 담았다 생각했는데 볼 수 없다는 것에 조금의 아쉬움이 들었다. 이제는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보니 아쉬움도 크게 길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계속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일을 하고 있다. 단순히 산다는 것과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 중심을 찾는 일이다. 그에 더불어 내 삶 주변을 이루고 있는 공간, 이 집과 내 방을 정말로 살아가고 돌아오게 싶게끔 만드는 곳으로 만드는 데 계속적인 노력을 해 나가고 있다. 완전하진 않을지라도 이곳이 언젠가는 정말 만족해하며 들어오고 머무를 수 있는 곳이 되리라고 믿는다. 계속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무르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