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대가리가 되기로 했다

어느 곳에 있든 너를 응원해

by 친절한금금


올해 중3인 조카가 고등학교 진학을 두고 고민이 많다. 사실 조카가 아니라 선생님에게 전화를 받은 나의 시누가 고민이다. “어머니 oo의 성적이 좋으니 특목고 혹은 자사고를 생각해 보셔도 되는데 혹시 준비하고 계신가요?” 나는 평소 시누가 아이 학업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기초작업만 해줬을 뿐 그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새 엄마들은 아이의 진학을 위해서 이것저것 많이 한다던데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시누는 10살 어린 나와 전화를 하며 “올케 학교 다닐 때는 어땠어?”라고 물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시내에 있는 여자 고등학교는 2곳이었다. A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오래된 여자 고등학교였고 B는 실업계 학교에서 처음으로 인문계를 만든 곳이었다. 나의 선택은 당연하게 친한 친구들이 많이 가고 명성이 있었던 A학교였다. 학교 성적이 아주 우수한 편은 아니었지만 시외에 있는 학교를 갈 정도로 나쁘지도 않았다. 원한다면 A와 B학교 중에서 선택이 가능했다.


지망은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1 지망 이후 B학교와 중학교 담임선생님께서 차례로 엄마에게 전화를 하셨다. 인문계를 시작하는 B학교는 학생들의 모집이 급했었다. 엄마는 선생님들과 진지하게 상담을 하신 후 나에게 이야기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갈 거야?” 이때 이 말이 가슴에 꽂혔었던 것 같다. 엄마와 길게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임팩트 있었던 저 한마디로 나는 과감하게 B학교를 선택했다. 친구들을 따라서 A학교를 가면 좋았겠지만 우수한 성적을 가진 친구들 사이에서 과연 내가 상위권에 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친한 친구는 한 명도 없지만 B학교에 들어가서 뱀 대가리라도 되어 보자는 마음으로 지원을 했다.


2 지망 이후에도 고민이 있었지만 엄마의 한 마디가 머릿속에 남아 결국 나는 B학교에 진학했다. 인문계 1회였던 나의 고등학교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하여 인문계 반 안에서도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기숙사에 살게 하면서 학업 성취도를 높이고자 했다. 학교는 산 중턱에 있어서 통학을 하려면 버스 타고 40분 걸어서 20분을 가야 하는 곳이었다. 오히려 기숙사에 살 게 된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외동딸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첫 경험을 하게 되었다. A학교였다면 감히 생각해 볼 수 없었던 나의 첫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기숙사 가장 위층에는 독서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면 일정 시간까지 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사감 선생님의 감시 아래 공부를 마치고 2인실로 된 방에 들어가 잠을 자고 학교를 가는 일의 반복이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웃음이 터지는 풋풋한 나이의 아이들이 함께 방을 쓰면서 별의별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별똥별이 한없이 많이 떨어지던 날이었다. 산 중턱이라는 좋은 위치 덕분에 우리는 우주에서 벌어지는 쇼를 일등석에 누워서 관람할 수 있었다. 어떻게 누웠겠는가. 각자의 이불을 가지고 나와 아스팔트 위에 깔고 누워 떨어지는 별을 봤다. 누워서 별을 보다 친구와 구령대로 자리를 옮겨 별을 바라보며 했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우리는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반짝이는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꿈에 대한 고민은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시기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기숙사에 신입생이 들어왔다. 신입생이 들어오는 만큼 2학년에서 기숙사를 관리할 수 있는 장(長)이 필요했다. 우리는 이를 도방장이라고 불렀는데 반장도 한 번 안 해봤던 내가 유일하게 맡았던 일이었다.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도방장이 도마 위에 올랐던 일이 있었다. 때는 온 국민이 열광하던 2002년 월드컵이 있었던 날이었다. 4강을 앞둔 우리나라는 포르투갈과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축구를 잘 몰라도 월드컵이 워낙 열풍이었기 때문에 열광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관심 있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나 지금 서울로 월드컵 보러 갈 건데 갈래?” 지금이 아니면 이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친구들을 따라 기숙사를 나왔다.


오후 5시 동서울로 가는 버스표를 끊고 고등학생 3명이서 어두운 서울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야밤에도 환하게 불이 켜지는 동대문을 돌아다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마로니에 공원이 있는 혜화역이었다. 우리도 나중에 대학로에서 대학 생활을 하자면서 부푼 꿈을 끌어안고 늦은 밤에 찾은 마로니에 공원은 술에 취한 사람들로 가득했고 길거리도 더러웠다. 내가 상상하던 마로니에는 <칵테일 사랑>이라는 노래처럼 상큼하고 버들잎이 하늘거리는 낭만이 가득했는데 실제로 마주했던 대학로는 나의 기대를 와장창 깨뜨렸다.


돈이 없어서 숙소를 들어갈 수 없었던 우리는 한 카페로 들어갔다. 다음 날까지 하는 카페 소파에서 감기는 눈꺼풀을 부여잡으며 정신을 붙잡다가 테이블에 있던 물컵을 깨고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부리나케 가게를 도망 나왔다.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상암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우리는 드디어 월드컵을 보기 위해 발검음을 옮겼다.


아침에 도착한 상암은 기대 이상이었다. 층층 계단과 떨어지는 인공 폭포,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경기장 앞열에 자리를 맡기 위해서 밤잠을 마다하고 줄을 서 있었다. 비교적 일찍 왔던 우리도 경기 시작 12시간 전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 정도 위치면 충분히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자리였다. 붉은 악마 옷을 다양하게 차려입은 사람들과 북을 치며 벌써부터 소리치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친구가 켜서는 안 될 핸드폰을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핸드폰에 친구의 담임선생님 전화가 왔다. 방금까지 발그랗게 화색이 돌던 얼굴은 어둡게 굳어졌다. 지금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기숙사에서 쫓겨 날 거라는 말에 집에서 살 수 없는 형편이었던 친구는 고민도 하지 않고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이럴 거면 왜 가자고 한 것인가. 한창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내려 몰려드는 시간에 우리는 시간에 역행하듯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오후 4시 학교로 들어가는 우리는 인싸 중에 인싸였다. 창문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야유와 환호를 동시에 보내던 선배와 후배 그리고 친구들. “왜 왔어 끝까지 보고 오지” “왜 갔어 위험하게” 다양한 소리들이 우리의 귓바퀴를 울렸다.


A학교를 다녔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었던 추억이 B학교에 참 많이 있다. 물론 A학교를 갔어도 그 안에서 나는 즐거운 학교 생활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친했던 친구들과 떨어지는 일이 사춘기 소녀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부모님과 떨어져서 기숙사 생활을 한다는 생활 패턴의 변화 또한 인생에 걸쳐서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일들이 단순히 뱀의 대가리가 되기 위해서 벌인 일이었지만 어떤 환경 안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즐겼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의 한 말씀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 나는 친구 따라 강남을 가지 않은 대신에 현재 나의 인생 끝까지 함께할 고등학교 친구 4명이 있다. B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추억들도 있다. 1회 인문계였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졌던 관심과 혜택으로 원하는 학교에 지원해서 갈 수 있었다. 뱀 대가리 작전이 성공을 하긴 했다. 그리고 하나의 선택이 삶을 어떤 식으로 바꿀 수 있는지 체감하는 인생의 교훈을 배웠다.


나의 조카 또한 인생 일대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있을 것이다. 어느 곳에 가든 장단점은 있다. B학교 만이 주었던 추억과 혜택이 있었지만 A를 갔어도 분명 그 안에서 즐거운 일들은 넘쳤을 것이라고 믿는다. 뱀 대가리냐 용의 꼬리냐, 어느 위치에 있든 나라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어디서든 최선을 다해 잘할 내가 있을 뿐이다. 나의 조카도 분명 지금처럼 어느 고등학교를 가든 잘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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