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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Jun 21. 2024

새벽에 문 앞에 있던 종이 가방

새벽 6시 30분 남편이 출근하며 나는 도어록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났지만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일찍 일어나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지만 2시쯤 잠들어 땅밑까지 쳐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 감긴 눈을 감는 순간 띠리리 하고 문이 열렸다. '툭' 가볍게 뭔가를 던져 놓은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빠르게 사라지는 발걸음을 들으니 문 앞에 놓인 무언가를 남편이 집 안에 들여다 놓은 것 같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남편이 가져다 놓은 정체불명의 무엇보다 잠이 더 급했던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꿈나라 직행 열차에 탑승했다.


기상나팔 벨소리가 집안을 울려 소스라치게 단잠에서 깨어났다. 학교에 가야 하는 아이를 우선적으로 준비시키려 몸을 일으켜 보니 문 앞에 검은 종이 가방이 놓여 있었다. 아. 남편이 아침에 무언가 집 안으로 들여다 놨었는데 이것이었구나.



큰 사이즈가 민망하게 내용물은 작고 물컹한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손을 넣어 집어 올리니 차가우면서도 말캉한 도토리 묵이 들어있었다. 어제부터 육수에 도토리 묵과 채 썬 오이를 넣고 국수처럼 먹고 싶었는데 어찌 알고 도토리 묵이 나에게 왔을까 싶었다.


이런 천사표 행동을 할 사람은 '시누'밖에 없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시누가 전화 오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너 이거 먹을래?"


제철에 나는 참외부터 푹 고아 맑게 끓인 사골까지 시누는 아낌없이 올케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다. 밭에 다녀오는 날이면 상추부터 시작해서 다듬은 부추를 주는가 하면 1+1으로 싼 음식까지 준다. 외동딸로 자란 나에게 손 윗 시누는 때로는 친언니처럼 때로는 친정엄마 같은 모습으로 정을 나누며 사랑을 표현한다.


우리 집 앞에 있는 음식이라면 시누 말곤 없을 것이지만, 한 번도 말없이 주고 간 적이 없었기에 카카오톡으로 종이가방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았다.


"언니 새벽에 혹시 도토리 묵 가져다주셨어요?"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나 아닌데?"


아. 그럼 누구란 말인가. 그 때마침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카풀을 같이 하는 형이 도토릭 묵을 줘서 집에 들여다 놓고 출근을 했다고. 그랬구나. 순간 당연히 시누일 것이라고 생각에 웃음이 났다. 시누라는 존재가 남편의 누나를 넘어서 나에게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길래 이런 일이라면 당연히 시누일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기브 앤 테이크의 원칙으로 따지면 시누에게 나는 한없이 모자라게 돌려주고 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 자르듯 50 받고 50을 줄 수 없기에 고마운 마음만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시누에게 다하려고 한다.


소영 작가의 그리는 마음에서 반가운 글귀를 만났다.


"주는 사람은 되돌려 받기 위해 주지 않았을 텐데, 나는 받으면 그만큼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항상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중에 언젠가, 네가 필요한 일에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면 돼. 그러면 되는 거야."


사랑을 받아 봤기에 줄 수 있는 여유도 생기는 것 같다. 시누에게 받았던 온정을 시누에게 온전히 되돌려 줄 수는 없지만 받았던 기쁨을 잊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곳에 표현하려고 한다. 감자를 수확하면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해마다 짜 놓은 들기름을 아끼는 이들에게 선물하는 일처럼.


오늘은 시누 외에 생각지 않은 분께 귀한 선물을 받았다. 대장 게실 출혈로 채식 위주의 식단을 해야 하는 나에게 도토리묵은 소고기 보다 귀한 식재료다. 소식과 채식을 해야 하는 저녁에 도토리 묵과 상추, 오이를 간장과 고춧가루에 무치고 고소한 참기름을 넣어 무쳐 먹어야겠다. 마법의 가루처럼 쏟아지는 참깨를 뿌려 한 입 먹으면 고소하게 터지는 풍미만큼이나 사람 사이의 정이 묻어나는 저녁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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