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건 아이들이 벗어 놓은 허물 같은 빨래들이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와 유치원에 간 뒤 부랴부랴 빨래들을 돌린다. 하얀 옷이 검은 물이 들지 않게 검은 옷과 분리해서 세탁을 돌리고 보니 하루에 세 번 세탁기를 돌리는 일은 예삿일이다.
여느 날같이 빨래를 돌리고 드럼 세탁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수건을 꺼내 드는 순간 평소와 다른 무게감에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탈수가 덜 된 건가?"
정밀한 저울이 아니기에 손의 감각이 잘못된 것이라 치부하고 다음 빨래를 이어갔다. 두 번째 빨래와 건조기가 모두 돌아가고 세 번째 빨래를 한 후였다.
"어? 왜 이렇게 탈수가 덜 된 것 같지?"
저녁 7시, 남편에게 이상 신호를 전달하며 세탁기를 바꿔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하이마트가 문을 닫는 시간은 저녁 8시 30분이었고, 빠른 걸음으로 가서 제품을 보고 온다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세탁기를 한 번 더 돌리고 집을 나섰다.
10년 간 드럼을 써오면서 가장 답답한 부분은 빨래를 중간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요즘 문에 소형 문이 달려 나오는 것들은 중간에 세탁물을 넣을 수도 있지만 가격이 싸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문이 없는 드럼 제품들도 중간에 세탁물을 넣을 수는 있지만 물을 모두 빼고 세탁물을 넣을 수 있다.
아이들은 왜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고 난 뒤 수건이나 옷들을 가져오는 건지. 다음 세탁까지 세탁물을 젖은 채로 보관해야 하는 불편함이 어지간히 싫었다. 어릴 적 언제든지 정지 버튼 한 번 누르고 세탁물을 집어넣었던때를 생각하면 드럼은 물을 적게 먹고 옷감 손상이 적다는 것 외에 장점이 없었다.
드럼 세탁기 관리 역시 나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남들은 주기적으로 청소를 잘해준다지만 문 앞에 고무 패킹에는 곰팡이가 피어나기 일쑤였다. 세탁조 청소 세제를 뒤늦게 알고 주기적으로 청소를 했지만 이미 내부에 잔뜩 끼어 있는 떼들은 손으로 닦아 내지 않은 이상 알 박기 하듯 그곳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신혼 가전으로 산 삼성 드럼은 당시 최신형 답게 아날로그 버튼식이 아닌 터치 스크린으로 조작하는 방식이었다. 구매 후 3년이 지날 때쯤 스크린의 터치를 손가락으로 눌러도 도통 눌러지지 않았다. a/s 기간이 남아 있어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수리했지만, 몇 년이 지난 후 터치 스크린은 또 고장이 나고 말았다.
특별히 잘못 사용한 것이 없는데 터치 스크린을 볼 때마다 화가 났다. 아날로그 방식이 좋은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버튼은 사라지고 터치 방식으로 변하는 디자인들의 변화가 싫었다. 인덕션보다 손으로 돌려서 가스불에 팔팔 끓여 먹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답게 세탁기도 버튼으로 조작하는 게 좋았는데, 아날로그 제품은 흔치 않았다.
결국 터치 스크린 조작은 포기하고 표준 세탁 동작 버튼과 전원 버튼 두 가지로 5년을 버텼다. 그동안 섬세로 울세탁을 해야 하는 옷들과 탈수만 해도 되는 옷까지 표준 세탁 동작 버튼 하나로 드럼 안에서 돌아갔다. 통세척을 하고 싶어 물온도를 높이고 싶을 때는 가스레인지에 물을 끓여 세탁조 청소용 세제를 넣고 돌렸다. 터치 스크린을 달고 있었지만 고장 난 터치 제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유리판에 불과했다.
이제는 울세탁도 해보 싶은 마음에 터치 스크린 교체를 하기 위해 기사님을 불렀다. 세월이 흘렀으니 터치 스크린 가격도 내렸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격을 지닌 제품이라 30만 원을 주고 수리를 할 것인지 기사님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만약 세탁기를 바꾼다면 나의 선택은 통돌이였다. 통돌이 세탁기 평균 가격이 100만 원을 내외라고 생각했을 때 터치 스크린을 30만 원 주고 고치는 것보다 그에 조금 더 보태 통돌이 세탁기를 사는 게 더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기사님 또한 평균 가전 수명이 7년이고 세탁조 위생 상태나 평소 덜덜 거리는 소음 등을 고려하면 몇 일안에 세탁기는 운명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헛된 발걸음을 하게 해 드려 죄송하지만 친절한 기사님의 조언과 점검으로 다시 표준 세탁만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세탁기가 드디어 이상 증세를 나타내 주셨다. 엄마가 20년이 넘어도 깨지지 않는 그릇을 슬쩍 떨어뜨리며 아쉬워하던 게 생각난다.
"깨져야 바꾸지"
엄마를 닮은 나도 고장이 나지 않는 세탁기를 바꿀 순 없었다. 일단 표준 세탁 모드라도 돌아가기에빨래에서 쉰내가 날 때는 세탁조 세제를 넣고 청소해서쓰고 울세탁은 손빨래해왔는데 드디어 10년 만에 드럼 세탁기가 고장 났다!
하지만 세탁기를 쉽게 바꾸지 못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진즉 바꾸고 싶었다면 실행에 옮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한 건 베란다를 모두 비워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탁실에는 온갖 것들이 쌓여있다. 최근에 정리를 일부 했기에 전처럼 지저분하지는 않았지만 내 눈에 가시 같은 것들이 있었으니, 바로 벽들에 퍼져 있는 곰팡이었다.
수납장 사이로 하얀 벽에 존재감을 드러내며 조금씩 퍼져 나가는 곰팡이들을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지냈다. 남편이 봤다면 수납장을 치우고 바로 청소를 했을 테지만 게으른 성격인지라 보고도 못 본 척 곰팡이와 함께 지내왔었다. 하지만 세탁기가 고장 났고 헤어질 결심을 하기로 한 이상 곰팡이와 직면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새로 산 통돌이 세탁기를 들이기 위해 남편은 드럼 세탁기 옆 수납장을 치우며 벽을 가득 채운 곰팡이를 발견했다. 망했다. 미리 하지 않고 미뤄둔 검은 것들 들켜버렸다.
남편은 재빨리 화장실에서 청소용품을 들고 왔다. 곰팡이 제거제를 뿌리고 물로 닦아내니 하얀 벽의 실체가 드러났다. 간단한 일인데 왜 이렇게 미뤄둔 건지 다시 한번 후회된다. '겨울이 와 결로가 생기고 또다시 곰팡이가 생기면 그때는 모른 척하지 않아야지' 다짐도 해 본다.
10년 된 드럼은 이제 떠났다. 곰팡이도 떠났다. 그동안 살림을 못하는 주인 만나 몸이더러워져도 말도 못 한 채 열심히 돌아갔을 나의 신혼 가전. 신혼의 부푼 꿈에 살림도 해보지 않고 선택한 만큼 탈도 많았지만 나에게 맞는 세탁기 타입은 드럼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4 도어 냉장고가 시작되던 10년 전에도 양문형을 고집해서 샀었는데, 자취하면서 통돌이를 써봤기에 드럼 세탁기가 좋아 보였다. 냉장고는 4 도어처럼 냉동실이 밑에 있는 게 싫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지만 세탁기는 드럼이 나와 맞지 않는 이유를 몰랐었다.
10년 써보니 알겠다. 드럼 세탁기는 물도 적게 쓰고 세탁도 잘되지만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5년 만에 확고히 선 헤어질 결심으로 드럼 세탁기와 이별했지만과 앞으로 10년 나에게 맞는 제품으로 즐겁게 세탁할 생각에 두근거린다.이제는 세탁기 관리에 무지했던 지난날과 헤어질 결심을 하며, 오래 써도 새것 같은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관리하고 또 관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