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고 부모님은 같은 집에서 이십팔 년째 살고 계신다. 오래된 집에 살면서 바꿔야 하는 건 남편 말고 모든 것이었다. 좁은 주방을 트고 베란다를 확장했으며 기와를 올려 햇볕을 차단했다. 그리고 올해 십삼 년 된 도배지와 장판 교체했다. 새 집으로 이사 간 다면 편하게 공사를 할 테지만, 이미 한가득 차 있는 살림살이를 거둬내고 새로 도배와 장판을 하는 일은 곡소리를 내게 했다. '차라리 이사를 하고 말지'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반복재생처럼 말들이 흘러나왔다.
남들이 연휴를 떠났던 6월의 무더운 여름날, 부모님의 도배장판 작업을 돕기 위해 온 가족이 모였다. 삼촌, 숙모, 사위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가구와 가전제품을 옮기고 청소를 했다. 누런 벽지를 뗀 자리에 뽀얀 실크 벽지를 붙이고, 월넛색을 거두고 메이플 색상의 장판을 바닥에 덮었다. 더불어 40년이 넘도록 니스칠로 버텨오던 캐러멜 색상의 문짝마저 교체했더니 새 집이 따로 없었다. 변화는 충분했다.
다만 친정엄마에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저속 노화를 거스르고 가속노화로 변해버린 싱크대 상하부장이었다. 이번 공사를 진행하면서 엄마는 천장까지 오는 전자레인지 수납장을 맞추셨다. 새하얀 수납장 옆으로 월넛색 싱크대 하부장은 지우개로 지우고 싶은 옥에 티였다. 인테리어 업자에게 싱크대 수리를 요청했지만 시트지를 사서 붙이면 된다는 얘기뿐이었다.
"사위가 손재주가 좋아 보이던데 시트지 사서 붙여 달라고 하세요"
이런 말을 듣는다고 사위에게 말씀하실 장모님이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기름 떼 제거제를 상하부장에 뿌리고 청소했다. 십 년이 넘게 밝은 해를 마주하고 튀어 오르는 기름을 뒤집어쓴 상부장의 변색은 착색되어 변하지 않았다. 표면은 매끄러워졌지만 누런 색상은 그대로였다.
공사 후 며칠 뒤가 장모님의 생신이었다. 남편은 생신선물로 싱크대 시트지 작업을 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시트지를 사는 가격이 크게 비싸지 않지만 인건비가 비싸니 생신선물로 이만한 것도 없지 싶었다. 잘 붙여놓으면 10년은 거뜬히 쓰실 테니 싱크대 하나를 새로 해드리는 셈이었다.
두 시간 작업시간을 예상하고 친정으로 갔다. 문짝을 떼서 시트지를 붙이고 경첩에 다시 달면 끝나는 쉬운 작업이었다. 지난주 주말, 울룩불룩한 주방 타일 시트지작업을 했던 우리에게 평평한 싱크대 문짝은 누워서 떡먹기라고 여겼다.
아침 여덟 시 반 작업을 시작했다. 일찍 끝내고 점심은 계곡에서 백숙을 먹자고 계획을 세워뒀다. 싱크대 하부장 문짝을 떼고 작업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직감했다. 포기해야 하나? 시트지는 플라스틱을 종이로 만든 것처럼 두꺼웠다. 접착면에 잘 붙는다지만 모서리 부분에 붙이기 위해 엄지가 타들어가듯 문지르고 눌러줘야 했다. 거즈 손수건을 덧대어 밀고 붙이기를 반복하며 하나의 문짝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예상 작업시간에 사분의 일이나 걸렸다. 문짝이 열두 개였고 서랍이 다섯 개였으니 이 날 계곡은 갈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의지의 남편이었다. 아침 여덟 시 반부터 트로트를 크게 틀어 놓고 작업을 시작한 뒤로 마무리 지었던 밤 열두 시 반까지 남편은 포기를 몰랐다. 그러다 문득 건넨 한마디.
"학교 다닐 때 이렇게 포기를 모르고 끈기 있게 했으면 뭔가 달랐을 것 같은데?"
"그때는 목표가 없었잖아"
사람의 목표가 이다지도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끼며 지친 몸은 움직이지만 입은 다문채로 작업에 집중했다.
작업을 하면서 한시도 가만히 계시지 못했던 엄마는 작업을 말리실 뿐이었다.
"상부장은 하지 마"
북극에서 땀 흘리는 곰도 아니고... 에어컨을 틀어 놓고도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하는 사위의 모습을 보고 감사히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던 장모님이었다. 그뿐이랴 새벽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시는 힘든 엄마인걸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서랍을 열 때마다 치운 듯 안 치운 듯 정리되어 있는 가재도구들이 보였다. 늦은 밤 일 끝나고 오셔서 정리하셨을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사위 몰래 귓속말로 딸에게 전하는 비밀.
"저기 깨끗하지? 며칠 전부터 얼마나 치웠나 몰라"
하부장 작업을 마치고 나시 벌써 새것 같았다. 월넛의 영향이 어두운 색감만큼이나 깊었나 보다. 펄이 들어간 화이트 유광 시트지로 옷을 갈아입고 나니 산뜻 그 자체였다. 그러다 보니 기름에 찌든 상부장을 더욱 안 할 수 없었다. 잠시 쉴 겸 계곡에서 숨을 돌리고 저녁 여섯 시에 상부장 작업을 시작했다.
저녁 메뉴는 손녀가 좋아하는 삼겹살과 모두가 좋아하는 삼계탕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사위에게 한 마디 건넨다.
"사위 회 좋아하는데 저녁에 회 먹을까?"
감사함이 말로 부족하여 사위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저녁을 차리셨다. 육해공이 총집합했던 저녁상에서 가장 먼저 자취를 감춘 것은 회였다. 회 한 점에 장인 장모님과 술 한잔 나누며 먹다 보니 금세 바닥이 났다.
장모님이 만드셨기에 부드러운 육질을 자랑하는 뽀얀 삼계탕까지 먹고 나니 다시 작업을 할 시간이 다가왔다.
늦은 저녁이 되어 그만하라는 장모님의 만류에도 사위는 끝끝내 완성된 모습을 보고 자겠다며 시트지 붙이기를 계속했다. 보조 역할 할 뿐이었지만 작업 내내 서있다 앉았다를 반복하고 시트지를 들었다 놨다 정신없이 바빴던 나도 지쳐갈 즘 드디어 작업이 끝이 났다. 신데렐라가 집에 돌아가야 하는 밤 열두 시, 작업하느라 지친 우리는 찌들었지만 주방은 유리구두를 신고 화사하게 변신했다.
새로 맞춘 전자레인지 서랍장을 시작으로 화이트로 이어진 싱크대 상하부장은 주방을 길어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깔끔함 그 자체였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싱크대를 새로 맞췄다고 했을 것이다. 작업을 했던 우리 눈에는 미세한 기포가 보여서 아쉬움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멀리서 봤을 때 비전문가가 할 수 있는 영역 이상을 보여주었다.
"고마워용"
장인어른이 사위에게 건넨 한마디. 무뚝뚝한 아빠의 입에서 감사를 표현하는 말이 귀여움을 초과했다.
"그 어떤 선물보다 이보다 좋을 순 없을 거야. 사위 정말 고마워"
장모님은 변해버린 주방도 마음에 들지만 본인을 위해 땀 흘리며 하루 종일 애써준 사위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돈이 많아서 싱크대를 갈아드려도 좋았을 테지만, 엄마를 위해서 남편과 함께 하루를 애써가며 한 땀 한 땀 들인 시간을 선물해 드린 것 같다.
깨끗해진 주방을 볼 때마다 사위와 딸이 바닥에서 시트지 붙이던 모습이 생각나시지는 않으실지. 그 어떤 선물보다 마음과 정성으로 다했던 최고의 선물을 해 준 남편에게 나 또한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