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생색내기로 했다
나를 사랑하는 첫번째 방법
저녁 9시, 남편은 회식을 가고 없다. 덕분에 아이들과 자유롭게 티브이를 보면서 밥을 먹었다. 괜한 형식을 갖추지 않고 밥과 불고기 그리고 맥주 하나만 있어도 아이들과 나의 식탁은 근사하게 완성된다. 여유롭게 탄산이 톡 쏘는 보리음료를 들이키며 '이제 좀 자볼까?' 생각하는 찰나였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회식 간 남편은 전화를 하는 일이 없었다. 12시가 넘으면 염려가 되어 내가 전화를 할 뿐이지 먼저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 무슨 일일까? 갑자기 나쁜 예감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1차 끝나고 나왔어, 집에 갈 거야"
집에 온다고? 9시인데? 뻔한 스토리가 예상되는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이어갔다.
"혼자 오는 거야? 누구랑 같이 오는 거야?"
역시나였다. 남편은 2차를 집에서 하기로 했다며, 회사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3초의 정적을 두고 대답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알았어, 대신 집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안주랑 술 사 와"
남편과 나는 같은 직장에서 만나 결혼한 사내커플이었다. 결혼 전에는 남편의 자취방이, 결혼 후에는 신혼집이 회사 사람들의 아지트였다. 내가 퇴사를 한 후에도 우리 집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함께 들으며 새해를 맞이했었다.
손님의 방문은 아이들이 태어난 후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코로나가 한 풀 꺾인 반면 손님 초대는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은 내 성격 때문이다. 육아로 지쳐있을 때 맥주 마시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남편이 누군가를 데리고 온다면 나는 술친구가 생기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합석해서 마시는 일이 좋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가끔은 남편의 지인들이 내편이 되어서 이야기해 줄 때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남편보다 내가 즐기는 일이 많다.
집이 치워져 있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타인에게 깨끗하고 정리된 모습만 보여주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놀러 온 사람들이 주방 설거지를 도와주는 일도 있다(공유주방 같은 느낌?ㅋㅋㅋ). 이쯤 되면 성격이 좋다는 개념을 넘어서 무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9시에 손님들이 안주와 술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번 조합은 내가 모르는 신입사원과 대리들로 이뤄진 구성이었다. 동갑내기도 있었고 20대 후반의 막내 신입도 함께했다. 내가 만약 회사에 남아있었다면 10년 차가 넘는 선배로서 호령했겠지만, 지금은 상사의 와이프일 뿐이었다. 적절하게 대화에 치고 빠지면서 자리를 함께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내가 자리를 비우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아이들만 보고 지내는 내가 안쓰러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일까? 긍정의 합리화에 도달한 나는 술상을 차리고 어느새 사람들과 어울려 있다.
이제 막 결혼한 직원이 말을 꺼냈다.
"이 시간에 초대해 주시고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 와이프였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나는 그동안 이런 일들이 너무 당연했다. 대단하다고 여길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놀고 난 후 뒤처리를 하면서도 설거지가 더 늘어난 것에 기분 상했던 적이 없었다. 나도 즐겁게 놀았고, 설거지는 항상 쌓여 있었으니 누군가를 탓하고 원망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진짜 제수씨 같은 분 없어. 너 잘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허다하게 듣는다. 예전 같으면 그 말을 부정하면서 별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지난주 금요일 술자리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남편의 어깨를 한 대 치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오빠는 나한테 정말 감사해해야 해~ 어디 가서 이런 와이프를 만날 거야". 조금씩 나의 존재감을 남편에게 심어주기로 작정했다.
남편이 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나'다. 별거 아니라고 여기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잖게 여기다 보니, 나 자신이 낮아지는 느낌을 받아왔다.
내가 하는 일은 별거 아닌 일이 아니다. 늦은 밤에 들이닥치는 손님을 맞이하는 일, 450km가 떨어진 시댁을 가면서 멀다며 투정 부리지 않은 일, 시댁 식구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일 등은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잘 해내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나를 더 칭찬해 주고 기특하다고 여겨줄 것이다. 덩달아 남편에게도 나를 강하게 어필할 생각이다. 포용력 있는 성격을 핑계 삼아해오던 일들이 가정의 평화에 이바지한 것임을 당연한 일로 치부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시어머니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씀하셨다.
"우리 며느리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때마침 남편은 화장실을 가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어머니! 잠시만요! 남편 왔을 때 다시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센스 있으신 우리 어머니는 남편이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가족들 앞에서 나의 칭찬을 이어가셨다. 그리고 남편에게 다시 한번 속삭였다.
"나한테 잘해~"
남편에게 말하지만 나에게 말하는 한마디였다. 올해는 누구보다 나에게 잘하는 한 해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