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숙증은 아니기를 바라며..
너의 변화에 엄마는 준비가 안되었단다
일요일 늦은 저녁이었다.
'엄마, 나 가슴에 이상한 게 있어'
딸의 말을 듣자마자 가슴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어?? 이상한 것이 감지되었다. 8살밖에 되지 않은 딸의 가슴에 딱딱한 것이 있었다. 순간 불안함이 엄습했다. 혹시....
괜찮다고 딸을 안심시킨 뒤 곧바로 잠을 재웠다. 딸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나는 핸드폰을 열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성조숙증' 일까 봐 두려운 마음으로 초록창을 열었다. 가슴에 멍울이 생기는 것이 성조숙증의 하나일 수 있다는 글들이 여기저기 눈에 보였다. 그렇다고 아직 2차 성징을 위한 다른 것들은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몸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만져진다는 것이 께름칙해서 견딜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 눈을 뜨자마자 딸을 둔 엄마들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가까이 사는 시누부터 지인들 모두 물어본 결과, 가슴에 멍울은 생기기도 했다 없어지기를 반복한다고 했다. 하지만 주변에 8살-9살의 딸을 키우는 엄마 중에 나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딸은 언제나 키가 또래보다 큰 편이었다. 지금도 상위 3%에 들 정도로 키가 크다. 반면 마른 몸이기 때문에 성조숙증은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남편과 나의 키가 큰 편이라 아무거나 먹여도 큰 딸을 보면서 역시 키는 유전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먹을 것에 더 소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큰 딸은 편식이 심한 편이다. 고기를 좋아하지만 야채는 싫어한다. 단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빵, 과자, 젤리와 같은 것들을 주로 먹는다. 유치원이 끝나고 학원을 가기 전에는 과자 한 봉지 먹고 가는 것이 습관이었고, 아침에 식빵에 잼을 발라먹거나 시리얼을 먹고 가는 게 일상이었다.
딸에게 생길지 모르는 성조숙증의 원인이 꼭 식단 때문은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당장 병원을 가야 했다. 불안감으로 지식인에서 알려주는 한방 병원 광고만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문의의 소견을 들어보기 위해 주변의 병원을 찾아봤다. 발레학원을 가기 전 1시간밖에 남지 않아 동네 소아과를 가려하다 긴급한 상황임을 감지한 나는 성조숙증 전문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유치원과 가까운 곳에 예약을 한 뒤 하원 시간에 맞춰 방문했다.
이럴 때는 초보운전에게 없던 힘이 생겨서 초행길이지만 얼레벌레 주차를 하고 시간에 맞게 병원에 도착했다. 성조숙증을 위해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연한 수순처럼 진료와 관련한 설명과 동의서에 대한 서명 절차를 거쳤다. 성장판검사를 위한 엑스레이와 피검사 등을 할 때 10만 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던 나는 '네네' 소리를 한 뒤 잽싸게 서명을 했다.
인터넷으로 웬만한 정보를 검색하고 왔기에 엑스레이로 무엇을 찍을지 알고 있었다. 손과 무릎 쪽 사진을 찍고 나온 뒤 원장님의 설명을 들으러 갔다. 엑스레이 사진을 켜고 선생님은 딸의 성장판 상태를 보여주셨다. "여기 보이는 게 성장판인데, 성장이 멈추게 되면 이 선이 사라질 거예요". "따님이 8세를 기준으로 하면 뼈나이가 1년 빠르지만, 키가 원체 큰 편이기 때문에 정상범주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일단 안심을 했다. 키가 크기 때문에 지금 1년 빠른 뼈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혹시나 3년 정도 뼈나이가 빨라서 엑스레이 검사만으로 성조숙증인 것이 단박에 판정이 날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딸의 가슴을 만져보신 여자 원장선생님께서 딸을 밖으로 보내신 후 차근히 설명해 주셨다.
"현재 멍울이 초기에 생긴 것이라 크기가 작습니다. 그리고 이런 멍울은 다시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2-3개월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후에도 멍울이 사라지지 않고 커진다면 그때 성조숙증을 위한 판정검사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성조숙증 검사는 30분 간격으로 5번의 채혈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소요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일단 오늘 피를 한 번 뽑은 것으로 갑상선 외 기타 요인들을 확인하여 멍울이 생긴 원인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굉장히 차분한 분이셨다. '양쪽에 멍울이 생기면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던데 괜찮을까요?'라는 나의 질문에도 미소를 지으시며 대답해 주셨다. 병원에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모범적인 대답을 들은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 꽤 긴 시간의 상담을 끝내고 아이의 검사를 위해 검사실로 향했다.
소변검사를 위해 종이컵을 받아 들고 간 화장실에서 아이의 소변을 받았다. 종이컵으로만 받아도 되는데 남의 소변을 받다 보니 뜨거운 것이 내 손에 타고 흐르기도 했다. 아이는 더럽다며 피하지만 엄마인 나에게는 검사를 위한 귀한 소변이다 보니 애지중지 들고 검사실에 전달했다. 피검사는 수월하게 이뤄졌다. 무릎이 안 펴져서 응급실을 갔을 때도 생각보다 잘 해내더니 이번에도 찍소리 내지 않고 주사기 한가득 피를 뽑았다. 주사를 뺄 때 따끔했는지 이마를 찡그렸지만 기특하게 잘 해내주었다.
결과는 다음 주에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일단 검사를 하고 의사 선생님에게 전문적인 상담을 받아서인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딸은 그 뒤에도 가슴 주변이 아프다는 소리를 종종 했다. 인터넷상에서 스치기만 해도 아프다 혹은 찌릿한 고통과는 다른 종류 같았다.
이 날부터 우리의 식습관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환경호르몬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글을 봤기 때문에 그동안 먹었던 인스턴트들을 끊기로 했다. 완전히 끊을 수는 없지만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것들을 멀리하려는 노력을 기했다. 아침은 밥과 국을 먹고, 유치원이 끝난 뒤에는 고구마를 삶아서 가져갔다. 거실에 늘어놓았던 과자들을 보충하지 않고 당분간은 사지 않을 것을 남편에게 통보했다. 우리 집에서 과자를 가장 많이 먹는 것이 남편이었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킬 필요가 있었다.
학원을 마치고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 과자를 달고 살던 딸들에게 과일을 까서 내주었다. 손에 습진이 있다거나 혹은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귀찮다는 이유들로 편한 간식을 주었다. 이것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아직 내 우리에는 소가 한 마리 더 있다. 아직 6살인 딸을 위해서라도 아직 성장기인 8살 딸에게도 더 나은 외양간을 마련해 줄 절박함이 생겼다.
아이는 힘들게 키워야 한다는데 그동안 편하게 티브이를 보여주고 인스턴트 음식을 주며 키웠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간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릴 수 없기에 앞으로 힘들지만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부단히 움직여야 하는 나의 역할에 큰 힘을 실어주고 싶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늦었다지만, 선생님께서 극초기에 발견했기 때문에 치료를 하기에 절대 늦은 시기가 아니라고 했다.
병원을 다녀오고 3일이 지난 후 멍울은 크기가 작아지고 있다. 아이도 이제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대로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직은 네가 거기 있을 때가 아니야. 나와 아이가 몸의 성장을 감당할 수 있을 때 변화가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 이번 멍울을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인다. 딸이 마냥 아이로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1차 경고. 지금처럼 아이를 챙기면 안 된다는 2차 경고. 3차 경고까지 받지 않기 위해 앞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식단과 수면 관리에 소홀하지 않아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들이 너무 빨리 자라 버리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