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친절한금금 Jun 20. 2023

남편 몰래 남편옷을 버렸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빨래에서 손끝으로 옷의 귀퉁이를 잡아 올린다. 눈은 티브이를 향해 있지만 손으로는 빨래를 개는 일이 자연스럽다. 남편은 옷걸이 걸어 놓은 을 좋아해 각을 잡아 개지 않고 한번 접어 놓은 다음 옷장에 걸 수 있게 모아둔다.


오늘도 남편의 하얀 옷을 집어 들어 반으로 접으려는 순간 께름칙한 붉은색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붉은 꽃 비라도 내린 건가. 남편옷의 새 하얀 옷에 사춘기 여드름처럼 빨간 얼룩이 군데군데 물들어 있었다. '하...' 이제는 기가 차서 할 말도 없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의 하얀 옷처럼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의 회색 바지에도 수건에도 붉은 자국은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빨래를 다 갤 때까지 빨간 자국의 범인은 찾지 못했다. 립스틱이라도 넣고 돌린 걸까? 평소 립스틱도 바르지 않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 가설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크레파스'인가? 아이들이 물건을 아무 데나 놓긴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싶었다.


살림을 워낙 못한다. '못'한다와 '안'한다를 구분 지을 수 없이 모두가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살림을 부지런히 하지 않고 미루고 미뤄 한꺼번에 하는 것은 모토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설거지, 빨래, 청소 모든 것들은 가족들이 모두 집에 모이기 직전까지 미뤄두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다.


그중에서도 빨래는 미루기의 끝판왕인데, 일주일 동안 모아둔 빨래를 하루에 3번 돌려서 건조기를 이용한다. 어차피 모아서 할 거라면 분류해서 빨면 되는데 선입선출을 꾸준하게 지켜오는 나로서는 색깔과 용도의 구분 없이 먼저 내놓은 순서대로 빨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흰 옷들이 받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알 수 없는 회색 얼룩이 지는 것이 다반사다. 너무 심한 경우는 남편 몰래 옷을 버리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남편이 버린 옷을 기억하지 못하고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락스를 이용해도 수습이 안 되는 경우에는 어쩔 수이 옷과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옷을 보면서 생각한다. '이제는 색깔별로 분류해서 세탁을 해야겠다고...' 하지만 습성은 그렇게 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서 아직까지도 나는 종류의 구분 없이 세탁기에 최대치의 빨래를 넣고 돌린다.


살림을 잘하는 동서와 통화를 할 때면 내가 살림에 투자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적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도 살림을 하긴 한다는 것이다. 다만 나의 살림은 비효율적이다.


동서는 집이 깔끔한데 의외로 살림에 투자하는 시간이 적은 편이다. 족집게 비결을 물어보니 '정리정돈'이 답이라고 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물건이 있으면 두세 번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살림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동선을 최소화하라고 조언해 줬다.


나 같은 경우 빨래를 한꺼번에 해서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린다. 일부 건조대에 자연건조해야 하는 것들은 건조기에 넣기 전 또 한 번의 분류를 한다. 건조기가 다 돌고 빨래를 개다 보면 '아차'할 때가 있다. 건조기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옷이 열풍건조되어 3분의 1 사이즈로 줄었기 때문이다. 동서는 애초에 옷을 분류해서 세탁한다. 검은 옷, 하얀 옷, 색깔옷, 자연건조 옷 등 구분 지어 빨래를 한다. 옷걸이에 자연 건조한 옷은 개는 동작 없이 그대로 옷장에 넣는다. 나처럼 개고 정리한 뒤 다시 걸어야 하는 수고가 없는 것이다.


효율이라는 것은 들인 힘과 노력에 대비하여 얻은 성과를 말한다. 내 살림의 효율은 그야말로 바닥을 찍고 있다. 오늘처럼 남편의 흰 옷이 정체불명의 원인으로 빨간 꽃을 피우면 심란한 하기가 짝이 없다. 그런데 이대로 계속 유지해야 할 것인가? 나의 살림에 변화를 줄 것인가? 갈등을 한다는 자체가 웃기지만 나에게는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와 같다.


최근 남편이 베란다에 선반을 설치해 줘서 쾌적한 환경에서 베란다를 이용하고 있다. 이곳에 조금의 투자를 하는 것이다. 적어도 흰옷만은 피해를 받지 않도록 구분 지을 수 있는 분류함을 만들어보자. 지금 버려야 하는 남편의 옷에게는 미안하지만 덕분에 빨래를 대하는 태도를 다잡는다. 자, 앞으로 남편의 옷을 버리는 것은 오늘까지 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정아빠의 해외여행 선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