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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Aug 16. 2023

친정아빠의 해외여행 선물

코로나가 끝나가니 하나 둘 해외로 여행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친정아빠도 그 무리에 합류하듯 일본으로 여행을 가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동네 지인분들과 함께 여행 갈 날을 잡으셨다고. 아빠가 비행기를 타신 건 이번이 3번째 이다.


용접일을 하시다 추락 사고를 겪으시고 중환자실에서 긴 시간 재활의 시간을 거치셨다. 퇴원하고 얼마 후 "우리 식구도 비행기 한 번 타보자"라고 하시며 제주도행 티켓을 끊으셨다. 당시 대학원 생이었던 나는 부모님이 끊어놓은 패키지 상품의 하나가 되어 동행했다. 유리 박물관, 식물원 등 가이드가 이끄는대로 제주도 단면의 끄트머리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게 전부였다.


심지어 아빠가 오랜 병원 시간을 끝내고 가는 여행이었기에 말도 못 하게 긴장이 되었다. 자각하지 못했던 걱정은 몸의 신호로 나타났는데 화장실이 보이는 족족 몸 안에 가득한 것들을 배출해 내는 것이었다. 회가 제 맛인 제주도에서 회는커녕 설사약을 안고 지내야 했다니 다시 생각해도 제주도 여행은 즐거움보다는 가족의 첫 비행이라는데 의미가 있었다.


두 번째 아빠의 비행은 엄마와 둘이 함께 가신 사이판 여행이었다. 제주도를 시작으로 아빠는 탄력을 받으신 듯했다. 한 번이 어렵지 해보면 두 번 세 번째는 일도 아닌 것이다. 아빠는 돈 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며 여행사를 통해 사이판으로 가셨다. 부모님의 신혼여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학생 신분이었지만 조금씩 모아둔 돈으로 커플 수영복을 마련해 드렸다. 다홍색 수영복에 큼지막히 막힌 하얀 백합이 20대 신혼부부 보다 잉꼬부부처럼 보일 수 있게 해 주리라. 다녀오신 여행 사진을 보니 원피스 수영복을 과감하게 입은 엄마와 수영복 바지 위로 하얀 배를 볼록 내민 아빠가 짓궂게 웃음 짓고 있었다. 역시 사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아빠의 해외 발걸음이 시작됐다. 이번에도 여행사를 끼고 가는 것이지만 아빠는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전화를 잘하지 않으시는 아빠가 웬일로 물 게 있다면 연락하셨다.


"일본 가서 전화는 어떻게 하면 되니?"


무언가 알아보기 귀찮아하는 딸이지만 곧 아빠가 출국할 테니 서둘러 인터넷으로 알아봤다. 아빠만큼이나 해외여행에 대한 경험이 적었기에 초록창을 열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나였다. 전화 같은 경우는 KT를 쓰고 계시기에 별도의 로밍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글을 보았다. 어차피 인터넷을 쓰실 일이 없으시니 전화를 하실 테면 평소처럼 하시면 된다고 전해드렸다.


일본으로 떠나시는 날 잘 다녀오시라고 전화를 드렸다. 평소보다 상기된 아빠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넘어 우렁차게 들려왔다. 그리고 공항에서 로밍을 신청했다고 하셨다.


"아빠 일본가서 카카오톡을 하실 일이 있으셔요?"

"요새 가이드들은 여행 일정을 다 카카오톡으로 전한데~"


가이드와의 소통을 위해 공항에서 로밍을 신청하셨다고... 하지만 아빠는 가이드보다 손녀들에게 더 많은 카카오톡을 하신 것 같다. 일본에서 찍으신 사진들을 보내시는 가 하면 카카오톡을 이용한 페이스톡으로 손녀들에게 일본에 와 있는 모습을 자랑하셨다. 한 껏 들뜨신 아빠는 보여줄 것이 있다며 페이스톡을 하다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


"이거 할아버지 너희 주려고 산 거야~한국에 돌아가면 줄게"


연필깎이와 색연필 등을 샀다는 아빠는 손주들이 지르는 환호성을 들으며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가셨다.


아빠가 일본에서 돌아오시고 2주 뒤 친정에 방문했다. 아빠는 우리를 보자마자 준비한 선물 꾸러미를 펼쳐 보이셨다. 말씀하셨던 색연필과 연필깎이 외 연필세트도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아신 것도 아닐 텐데 우연찮게 사신 물건들이 손녀들의 취향을 저격했다. 하지만 나는 불만이었다. 연필깎이 같은 것은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데 굳이 2개를 사 오실 필요가 있었을까... 넌지시 토로했던 말을 들으신 아빠는...


"어떻게 하나 만 사 와 그러면 싸움 나지 허허허"


둘이니까 무조건 똑같이 사줘야 한다며 연필깎이도 2개, 색연필 세트도 2개, 연필세트도 2개를 사주셨다. 덕분에 싸움 없이 아이들 모두 만족했다. 문득, 아빠는 외동딸이 나 하나만 키우시면서 어떻게 그런 걸 아실까 싶었다. 막상 나는 아이 둘을 키우면서 모든 똑같이 해주는 게 어렵다. 그러다 보면 늘 한쪽이 서운해지는 일이 많았는데 부모님은 손주라서 그런지 간식이나 장난감을 사주실 때도 같게 해 주신다. 그러니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더 좋아하라 하는 걸지도..


이제 선물은 끝난 줄 알았는데 아빠가 무언가를 가리키며 사위와 딸의 선물이라며 건네주셨다. 검은색과 알록달록한 방망이 같은 것 하나씩이었다. 검은 것은 사위 것 알록달록한 것은 딸의 우산이라 하셨다. 아이들 선물 만 있을 줄 알았는데! 마침 가방에 쏙 들어갈 우산이 필요했는데 아빠가 사주신 선물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5단으로 접히는 것인지 약간 부실해 보이기도 했지만 긴급할 때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았다. 기뻐하는 나의 옆에서 남편이 장인어른에게 받은 우산을 펼쳐보았다.


"응?"


펼친 검은 우산 끝에는 화려한 모양으로 흰 파도무늬가 곱게 수놓아져 있었다. 강한 햇볕도 튕겨 나갈 것 같은 매끈한 곡선을 타고 내려와 심심해 보이지 않게 생긴 무늬가 들어가서 올여름에 들고 다니면 딱 좋을 여성용 양산이었다. 아빠는 검은 우산의 모양새만 보시고 사위를 위해 여성용 고급 양산을 사 오신 것이다.


멋쩍어하는 남편의 표정 뒤로 환호성을 지른 건 나였다. 이번 여름에는 꼭 양산을 사야지 했지만 쉽게 돈을 주고 사지 못했던 물건 중 하나였다. 저렴하게 만 원주고 산 양산은 쉽게 고장이 났고 백화점을 가서 사자니 시간을 핑계 삼아 모자를 쓰고 다니는 편을 택했는데 원하던 선물이 들어온 것이다. 과하게 좋아하는 내 옆에서 씁쓸한 표정으로 있는 남편에게 방에서 아빠가 무언가를 들어와 건네주셨다.


"이거 받아 사위"


아빠는 일본에서 쓰고 남으신 엔화를 사위 앞으로 내미셨다. 남편은 우산을 받을 때보다 두 배는 커진 눈으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돈을 받았다. 역시 돈보다 좋은 것은 없는 건가..ㅎㅎ... 아빠도 만족하신 것 같았다. 함께 여행을 가지 못했으니 선물이라도 모두에게 주고 싶었는데 특히나 백년손님이라는 사위의 선물이 없는 게 됐으니 마음이 불편하셨던 게다.


이번 여름처럼 뜨거운 날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강한 햇볕을 모두 튕겨내고 걸어 다니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아빠의 양산을 쓰면 더위도 한 풀 꺾인 것 같은 느낌이다. 올여름 필수템인 양산을 들며 아빠를 떠올린다. 아빠가 가족을 생각해 준 마음은 당연하거니와 사위에게 건네주었던 여성용 양산은 두고두고 나에게 미소를 띠어주는 웃음 필수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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