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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Sep 01. 2023

아빠는 왜 비싼 프린터기를 사신 거예요

"딸, 아빠가 프린터를 샀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어떤 걸 산 건데요?"


친정집에서 사용하시던 프린터기가 수명을 다 했나 보다. 기계가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카트리지 부족으로 소모품을 변경해야 했다. 가까운 마트에서 상담을 받은 아빠는 고민 없이 프린터기를 새로 사기로 하셨다. 카트리지를 갈기 위한 값이 기계값과 비슷할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새로 기계를 사는 편이 낫다고 판단된다는 점원의 설득에 합의 한 것이다.


"이게 잉크도 덜 먹고 인쇄가 엄청 많이 된다더라~"


아빠가 산 프린터기는 말씀하신 대로였다. 심지어 잉크가 부족해서 카트리지를 교체할 때도 비용이 적게 드는 장점이 있는 캐논 잉크젯 복합기였다. 다만, 기계 비용이 비쌌다. 잉크가 부족해서 교체 시에 비용이 적게 드는 만큼 초기 비용이 크게 들어가는 단점이 있었다. 기계가 고장 나기 전까지 10년 이상은 거뜬하게 사용하는 아빠에게는 오히려 잘된 선택인 것 같았다. 문제는 설치였다.


마트에서 샀기 때문에 기계를 들고 왔을 뿐 설치 기사는 함께 오지 않았다. 더불어 설명서에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만 표시되어 있었서 아빠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인 외동딸의 설명 뿐이었다. 구매하신 제품의 이름을 보고 블로그의 글을 찾아 설명서를 보내 놓고 생각했다. 아빠가 글을 모두 읽고 설치하는 게 가능하실까?


유튜브로 정보를 검색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아빠의 편의를 위해 처음으로 유튜브 검색창을 이용해 '캐논 g3920 설치방법'을 쳐봤다. 영상 속 성명은 6분으로 간단했지만 성미가 급한 나는 온전히 앉아서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역시 나는 글이 편하다. 하지만 먼 거리에 살고 계시는 아빠를 도울 수 없는 내가 택 할 수 있는 방법은 상대가 이해하기 쉬운 설명법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유튜브 영상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기에 공유 버튼을 눌러 아빠에게 전달했다. 몇 분이 지난 뒤 전화를 걸었다.


"아빠 설치했어?"

"잉크도 넣고 코드도 다 꽂았는데... 컴퓨터랑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내일 네가 와서 해 줘"


응??? 순간 당황했다. 차로 90분 거리에 살고 계신 부모님이지만 목요일 평일이었고 나에게는 픽업을 해야 하는 딸 둘이 있었다. 아빠가 농담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꽤나 진심으로 말씀을 하고 계셨다. 운전을 하고 있으니 고속도로를 타고 금세 와서 해주면 될 거 아니냐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같은 지역 안에서 가는 곳만 다니는 3년 차 초보운전에게 고속도로를 탈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를 던져준 거였다. 당장 남편과 상의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시누에게 부탁했기에 등원만 시켜 놓고 4시까지 돌아오기로 했다. 문제는 친정까지 무엇을 타고 갈 것 인가에 대한 논의였다. 태풍이 물러 직전의 상태였기에 남편에게 돌아온 답은 뻔했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가능했을 것 같은데, 위험할 것 같아"


즉흥적인 성격의 나는 바로 오케이 답변을 내렸다. 차를 이용한다면 90분 내로 친정에 갈 테지만 왕복하는 동안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행위들을 할 수 없기에 아쉬움이 없었다. 집에 있으면서 책을 펴거나 개인적인 행동을 함에 있어서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는 나에게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좋았다. 적절한 소음과 진동 안에서의 독서는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보다 높은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준다. 대중교통을 고 가기로 합의한 뒤 다음날 친정을 가기 위한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잠이 들었다.


아이들을 평소보다 서둘러서 보내야 했다. 그래야 시간마다 있을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을 테니. 아침이 되어 버스시간표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인천과 이천을 오고 가는 버스의 간격이 터무니없이 길었다. 8시 차를 타지 않으면 다음 버스는 11시 50분이었다. 시간표를 확인하고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니 현재 시간은 8시 30분... 이미 8시 버스는 놓친 뒤였다. 남편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미리 알았다면 8시 버스를 탈 수 있게 본인이 아이들을 챙겼을 텐데..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나에게 다른 방도가 있었다. 시간이 1.5배 더 걸릴 테지만 지하철을 타는 방법을 택했다. 이천에 지하철이 생겼지만 2시간 24분이 걸린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 방법이 아니라면 아빠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아이들을 서둘러 보낸 후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열차를 8분 전에 놓쳤다. 미리 알았다면 좀 더 일찍 친정에 도착했을 텐데... 30분을 기다려 지하철 타는 시간을 보니 허탈했다. 이 시간이었다면 아침에 쥐 잡듯 아이들을 보채 등원시킬 필요가 없었는데.. 미리 계획하지 않는 뼛속까지 P인 나의 성격에 헛움은 만 나왔다. 한 번 겪어봤으니 다음에 이천 갈 일이 있을 때 반드시 미리 버스와 지하철 시간을 확인하리라. 글을 쓰는 이유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라는데, 앞선 실패의 상황을 통해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조용히 다짐해 본다.


지하철 문은 쉴 새 없이 열리고 닫혔다. 많은 정거장 개수만큼 책장도 쉴 새 없이 넘어갔다. 읽다가 지치면 글을 쓰고 나를 돌아보며 오랜만에 주어지는 조용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역시 차를 끌고 가는 것보다 왕복 시간이 걸리더라도 글쓰기와 독서의 공간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좋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지하철이든 버스를 타고 독서시간을 가지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도착하니 아빠가 마중 나와 계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추석이 되어야 친정에 갈 수 있을 텐데 이번일을 계기로 아빠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일을 하는 엄마는 볼 수 없었지만 친정집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는 시간이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자라왔던 공간 안에 오롯이 아빠와 둘이 있는 상황이 마치 여드름 가득했던 중학교 시절의 나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아무 걱정 없이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던 시절, 시골 내음 가득한 전원주택에서 여유로움을 벗 삼아 즐기던 그 시절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


아빠의 프린터 설치는 완벽했다. 다만, 컴퓨터에 받아야 할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여야 했다. 간단한 설치 후 출력 버튼을 눌렀으나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큐알 코드에 찍힌 한글 설명을 봐도 유튜브를 봐도 이해가 안되던 찰나 프린터 설정에서 테스트 용지 출력 버튼을 누르자 인쇄가 되기 시작했다. 이것도 아니라면 카트리지를 모두 채운 후 완료 버튼을 누르지 않은 까닭이었까?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우왕좌왕하던 프린터 설치를 시간 안에 마쳤다. 가만히 지켜봐 주는 아빠 덕분에 시간의 재촉은 있었지만 무사히 일을 마쳤다.


딸이 일을 마치는 동안 이천 쌀밥을 지어놓으신 아빠였다. 예전에는 손수 차려드리지 않으면 식사를 하시지 않았는데 엄마가 출근하고 안 계시는 낮 시간에는 밥도 하고 설거지하시는 모습이 낯설지만 보기 좋았다. 물을 한 번 더 부어서 죽밥이 되었다고 했지만 나는 뭐든 괜찮았다. 부모님이 해주시는 것이라면 뭔들.


밥을 먹는 내내 마음이 바빴다. 버스시간이 20분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인천까지 태워주신다고 했지만 괜찮다고 사양했다. 편하게 갈 수 있지만 돌아오는 길이 가깝지 않았기 때문에 죄송한 마음도 있었거니와 버스 안에서 혼자있는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버스터미널까지 가면서 007 작전을 펼치듯 1분을 놓고 아빠와 긴밀하게 서둘렀다.


"혹시 버스 놓치면 전화해, 아빠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설령 버스를 놓쳐도 아빠가 뒤에 기다리고 있다는 마음 하나로 불안한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자라오면서 항상 느껴오던 감정이다.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부모님이 나를 뒤에서 든든하게 기다려 주실 거라는 것. 그 마음으로 어디를 가서도 하고 싶은 일을 당당히 해왔다.


출발시간 2분을 남겨두고 버스를 타서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나 버스 탔어요, 고마워요"

"멀리서 와서 도와줘서 아빠가 고맙지, 조심해서 들어가"


평소 효도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딸인데, 이런 사소한 일 하나로 아빠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도 되는 건가 사치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녁이 되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딸, 아빠가 출장비 안 줬어?"

"출장비는 무슨~~~ 아빠가 맛있는 점심 해줬어"


엄마는 딸에게 출장비도 주지 않았다고 아빠를 타박하셨나 보다. 히지만 나는 출방비를 이미 한가득 받았다. 무턱대로 오라고 해준 아빠 덕분에 추석이 되기 전 친정집에 가 볼 수 있었다. 한동안 일상 속에 짓눌려 오던 스트레스도 지하철과 버스를 타면서 하고 싶었던 독서와 글쓰기 시간을 야무지게 가진 덕분에 풀렸다. 아빠는 평소 주변에 살고 있는 조카들에게 컴퓨터 관련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딸을 불렀다. 아마 비싼 프린터기를 샀지만 설치를 못한다는 핑계보다는 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아빠의 욕심으로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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