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유난히도 빛나던 날, 구청 앞 싱그러운 초록 잔디 위로 새파란 하늘 감싸고 있는 토요일이었다. 여느 주말이었다면 사진 찍기 좋은 날씨를 배경 삼아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갔으리라. 하지만 이 날만큼은 비장한 각오로 아이들을 채비시키고 세종문고를 향했다.
동네 먹자골목에 오랜 시간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세종문고는 30대 마지막에 가입한 동아리 실이라고 할 수 있다. 베스트셀러 및 학습지가 비치된 1층과 그림책 그리고 다양한 도서가 있는 세종문고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순수하게 책을 구매하기 위한 것이었다. 책냄새를 좋아하기에 저렴하고 편리한 인터넷 서점보다는 오프라인에서 손에 쥐어지는 종이책을 느끼고 본 뒤에 구매하는 편이다. 수험생처럼 줄을 그으면서 보지 않으면 책을 읽은 것 같지 않아 도서관에서 대출하지 못하는 것도 서점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서점에는 그냥 갔다. 마음이 우울한 날에는 책표지를 훓터 보는 것 만으로 힐링이 되었다. 에세이 책 제목들이 한 권의 책처럼 부드럽게 연결되어 위로를 건네는 말이 된다. 서점에서 받는 위로의 횟수는 점점 늘었고 어느새 나는 인사 잘하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카운터에 서 계시는 사장님이 낯설지 않았다. 아! 큰 아이보다 한 살 위 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어린이집 동문인 것이다. 입담 좋으신 사장님과 어린이집이라는 공통 키워드로 친목의 탑을 하나 더 올릴 수 있었다. 친분이 더해지니 부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건너서 알고 있는 동화 작가님이 세종문고에서 글쓰기 수업을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접수 일자는 지났지만 자리가 있다면 함께하고 싶다는 이야기에 사장님은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다.
서점에서 수업을? 처음에는 많이 의아했다. 서점은 책 만 파는 곳인데 어디서 수업을 한다는 것인지. 두근거리는. 첫 수업 날 세종문고 한편에 비밀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비밀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개방된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수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점 한쪽에는 파티션으로 나눠진 공간이 있다. 테이블 세 개를 나란히 놓고 다과를 먹을 수 있는 정수기까지 있는 이곳이 동아리 실처럼 자주 드나들 공간이 될 줄이야.
글쓰기 수업이 끝난 후 마음이 맞았던 분들과 그림책을 함께 읽는 모임을 만들었다. 나를 제외한 세 분은 그림책을 많이 알고 아이들에게도 읽히신 분들이었다. 집에 그림책은 많지만 손도 안 대던 나에게 그림책 세계로 손을 내밀어주신 고마운 분들. 그들과 그림책을 읽는 시간이 좋았다. '좋았다'라는 단출한 한마디로 끝낼 수 없을 만큼 그림책을 함께 읽으며 나누는 대화 속에 서로를 진하게 알아가며 엄마 대 엄마가 아닌 나와 너의 만남이 되었다.
모임이 이어지다 보니 도서관 혹은 문화재단 같은 곳에 독서 동아리 세모(세종문고 모임) 이름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4명뿐이던 세모에 3명의 신규회원까지 더해져 마을 교육 공동체를 시작하려는 나름의 면모를 갖추었다. 한국어 강사를 하시는 회원분이 맞춤법 수업을 해주어 아이들이 띄어쓰기 같은 것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림책 전문가 회원님은 한여름밤에 들려주는 그림책을 통해 무더운 날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서점에 모여 그림책 속에서 수영하며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세모가 그림책 독서 동아리이지만 또 다른 관심사가 있는데 바로 '환경'이다.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물질적 자산보다 깨끗한 지구환경이라는 생각에 모두 공감하며 가까운 곳에서 가볍게 실천하는 환경모임을 이어가기도 했다. 예를 들면 용기 내서 동짓날 용기에 팥죽 사 오기, 동네 산을 오르며 쓰레기 줍기 등을 했다.
환경에 관심이 많은 회원분이 폐가죽으로 필통, 친환경 샴푸바 만들기 같은 수업으로 환경에 무지했던 나를 깨우쳐주기도 했으니 세모를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고 사는 게 얼마나 많았을까 싶다.
전업주부의 역할을 벗어나 각자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세모에서 내가 했던 일은 '재생 종이 만들기' 수업이었다. 폐지 재활용률이 높은 우리나라지만 왜 우리가 올바르게 종이를 분리수거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수능을 가장 잘 푸는 사랑은 수능 강사라고 하더니,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수업자료를 준비하면서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실천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2년째 이어온 수업에서 올해는 우유팩을 이용해 재생종이를 만드는 일을 해보았다. 양면의 코팅을 벗겨내면 고급 천연 펄프가 나온다. 결코 적지 않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선 물로 씻고 펼쳐 말린 뒤 모아 지정된 곳에 버리는 일련의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여린 손끝으로 우유팩의 코팅을 벗기며 냄새가 난다거나 잘 안된다며 투덜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그러모은 우유팩 펄프를 이용해 종이죽을 만들고 재생 종이를 만드는 과정은 아이들에게 생경한 즐거움이었다. 촉감놀이인지 요리수업인지 구별 안 가게 손을 쓰며 즐기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각자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 동아리 생활의 정점은 '북페스티벌'을 준비하며 드러났다. 밖으로 나온 도서관이라는 이름의 북페스티벌에서 <옛이야기 들려주는 세모>라는 이름으로 세모가 참여한 것이다. 이런 행사가 처음이 아니신 분들이 다수였다. 구청에서 행사를 하면 선물을 받고 체험하기 바빴었는데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될 줄이야.
독서 동아리를 하면서 올해 세모에서 읽고 있는 책은 신동흔 저자의 <옛이야기의 힘>이다. 이런 옛이야기가 있다고? 콩쥐팥쥐, 신데렐라, 백설공주 외에 재밌는 옛이야기가 참 많았다. 그림책을 많이 읽어 본 사람들도 <감은장아기>, <왕이 된 새샙이>, <오러와 오도>같이 재밌는 이야기는 몰랐을 것이다. 옛이야기의 즐거움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mz세대에서 유행하는 MBTI를 이야기 속 주인공과 연결시켜 보기로 했다.나와 같은 성격의 옛이야기 주인공은 누구일까? 생각만 해도 궁금증이 유발된다. 심지어 글을 잘 쓰시는 회원분께서 이해가 쉽도록 성격 유형과 주인공을 연결시켜 준 해설지가 더해져 전문성을 어필했다.
검사만 하기에는 아쉬면이 있어 같은 성격으로 나온 주인공을 재생종이에 그려 책갈피를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세모가 그림책뿐 만 아니라 환경에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림책 한 권 읽기, 그림책 퀴즈 혹은 재생 종이 만드는 영상 중 하나를 할 경우 친환경 선물을 드리기도 했다. 환경에 관심이 많으신 회원분이 고체치약, 실리콘 빨대, 소창행주, 나무칫솔 등에 대한 설명을 해주어 세모 부스에 오셨던 분들이 한 번은 지구 환경에 대해 생각하게 하지 않았을까.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앓을 만큼 북페스티벌은 나에게 큰 동아리 행사였다. 각자에게 맡은 역할이 있었는데 우유팩 재생종이와 재생종이 제작 영상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종이 만드는 것은 시간이 걸렸으나 어렵지 않았다. 다만 동영상 제작은 처음이라 앱 사용법에서 많이 고전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영상을 찍는다고 사놨던 핸드폰 거치대가 있어서 제작 과정을 촬영하기가 쉬웠다. 모든 과정은 원테이크! 두 번까지 찍은 것은 몇 개 없었다. 일사천리로 찍고 편집하고 자막을 넣으며 유튜버들은 이 과정을 매일 한다는 게 참 대단해 보였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어려웠지만 처음 시도하는 일이기에 희열감이 더 컸던 것 같다.더군다나 대학 시절 검도 동아리에서 전국대회에 참여하거나 학과 주점을 했던 단체 행사 외에 30대에 하는 동아리 생활이라니! 행사 시작 전 맞춰 입은 검은 티에 청바지까지 같이 입고 있으니 세모의 연대감이 더 끈끈해졌다.
타 동아리에서 구청행사를 해봤던 회원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까지 있어서 세모의 첫 북페스티벌은 성황리에 끝마쳐졌다. 물론 초반에 우왕좌왕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던 텐트에 놀라기도 했다. 선물만 가로채려는 얌체 손님에 고전하며 남몰래 웃었지만 세모에 방문한 대부분의 가족들은 그림책을 사랑했다. 아빠가 무릎에 아이를 앉히고 MBTI 검사지를 읽고 재생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생소한 옛이야기 책을 권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아이에게 읽어주었다. 재생 종이에 그리는 그림을 전시회 작품 제출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 신중히 그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이번 북페스티벌에서 세모를 방문한 분들이 그림책과 환경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우리가 했던 시간이 뿌듯함이라는 세 글자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