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여정이 되길 바래

드디어 케냐로 출국

by 해강


그날은 하늘색이 참 예뻤다.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엄마가 그랬다. “다현아, 엄마도 데려가면 안 돼? 내가 너 따라다니면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줄게.” 엄마는 방학 때마다 어딜 그렇게 자꾸 싸돌아다니는 딸내미가 부러웠나 보다.


엄마랑 아빠랑 결혼할 적에,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엄마에게 결혼 후에 같이 미국에 가서 살자고 프러포즈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28년째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계신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공항에 가는 걸 좋아하는 듯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엄마가 공항까지 데려줬는데, 엄마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다현아, 난 진짜 네가 참 부럽다.”

“엄마는 너 나이 때에 그렇게 하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엄마의 꿈은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었다. 엄마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서류전형까지 통과해 실기시험을 치렀는데, 최종 면접에서 아쉽게 탈락했다. 한번 더 도전해보지 못하고 바로 결혼한 것이 아직까지도 마음 한편에 아쉬움으로 남아있나 보다. 그런데 나는 뭐든 많이 도전해보는 편이었다. 특히 내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항상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엄마를 찾았다. 한껏 들뜬 얼굴을 하고서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엄마의 맞은편에 서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누구를 만났고,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영감을 주는 사람들을 쫓아다닐 수 있게 된 것도 다 엄마의 덕이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변명이지만 나는 언어 컴플랙스가 있어, 책을 단 한 권도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다. 그런 내게 직접 책을 읽어, 유명한 인사들의 성공담을 이야기로 풀어준 건 엄마였다. 나름 기억력이 좋았던 나는, 책 한 권 읽지 않았지만 엄마가 예화로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 헌신으로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엄마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그런 날이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함께 출발하는 팀이 모여 있었다. 내가 이 그룹에서 거의 막내였기 때문에 언니들이 나를 챙겨주었다. 공동 짐이 있어 서둘러 짐을 나누고 무게를 맞춰보는데, 편의점에서 박스까지 사 오면서 가방 한 개를 거의 뒤집어엎다시피 했다. 무게를 적당히 나눠 싣는 게 일이라면 일이었다. 짐을 조금씩 나누다 보니, 내 작은 캐리어 하나에 공간이 많이 남게 되었다. 나는 기내에 갖고 타려고 했던 노트북 가방을 그냥 캐리어 안에 쑤셔 넣고, 짐을 부쳤다. 그게 나중에 엄청난 문제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렇게 엄마랑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잔뜩 부풀어 오른 마음에 찬물이라도 확 끼얹기라도 듯, 비행기가 연착됐다. 그래서 우리는 밤새 비행기를 기다려야 했다.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가 아무래도 미술교육 봉사활동이다 보니 참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다 예술가들이었는데, 기다림이 익숙한지 다들 가방에서 주섬주섬 뭘 꺼내기 시작했다. 작은 스케치북과 색연필 뭉치. 미술 경력으로 치면 고등학교 때부터 당시 내가 대학교 2학년이었으니까, 나름 미술을 해봤다면 또 해봤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진짜 예술가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도 가방에서 수첩을 하나 꺼내 들었다. 사실 해외봉사를 신청했을 땐 붙을지 모르고 신청했던 터라, 막상 합격이 되고 나서 너무 힘들었다. 우리 집에서는 아빠의 돈을 쓰기 위해서는 과장을 조금 더 보태서, 사전에 결재서류를 올려야 했는데 승인이 떨어져야만 아버지의 돈을 타서 쓸 수가 있었다. 사전에 부모님께 여쭤보지 않고 신청해놨던 거라 비행기 티켓 값 정도는 내가 마련해야 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저지르고 보는 나의 소비습관 때문에 생겨난 집안의 제도 같은 거랄까. 그렇게 비행기 값을 모아보겠다고 나는 엽서를 만들어 팔았다. 교회에서도 팔아보고, 이 사람 저 사람 연 닿는 대로 찾아가 엽서를 드밀면서 후원을 부탁하기도 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때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그런 수첩이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고, 얼마를 후원받았는지 빼곡히 적혀있는, 이미 나와 많은 것을 함께한 전우와 같은 존재였다. 그 수첩 맨 앞엔, 이번 여행의 목표 6가지가 적혀 있었다.

1. 현지 친구 사귀기

2. 같은 꿈을 꾸는 친구 만나기

3. 전통 의상 구입하기

4. 스와힐리어 배우기

5. 아프지 않기

6.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기


내 첫 번째 목표는 아프리카 친구를 사귀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 나는 흑인을 좋아했다. 요즘은 흑인 연예인도 방송에 나오는 시대이지만, 내가 고등학생 때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영화배우 윌 스미스를 좋아했고, 흑인들이 갖고 있는 아프로 머리나 짜글짜글한 곱슬머리가 너무 예뻐 보였다. 대학교 2학년 때쯤이었나. 그 곱슬머리가 부러워, 미친 척하고 머리를 그렇게 볶았던 적도 있었을 정도니까. 그랬던 내가 어떤 친구를 만나게 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미 아프리카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첫 번째 리스트를 달성해 버렸다. 비행기 옆 자리에서 에티오피아 친구를 만났기 때문이다.


레마의 나이는 서른둘. 포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이었는데, 방학이어서 잠깐 가족들을 보러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다. 전기를 공부하고 있는 박사과정의 대학원생? “너 혹시 탁교수님이라고 알아?”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물어보면서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고모부께서는 오래전부터 강단에 계셨는데, 전기를 가르치고 연구하시는 전문가이다. 그래서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진짜 혹시나 하고. 그런데 저번 학기에 우리 고모부의 수업을 들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름 석자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있었다. 레마 덕분에 긴 비행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에티오피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연이 굉장히 아름다운 나라이니, 꼭 놀러 오라고. 또 그의 1년 동안의 한국생활, 본국에 있는 가족과 딸 이야기까지 우리는 잠도 안 자고 수다를 떨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밥이 맛있다며 또 수다를 떨었다. 비행기가 경유로 정차하고, 레마는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가 면세점에서 산 초콜릿을 주며 내게 말했다.


“좋은 여정이 되길 바래.”


레마가 준 초콜릿을 먹으며 나는 나이로비로 향했다. 벌써 목표를 하나 이루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도 좋은 일들만 있을 것 같은 기대감과 들뜬 마음에 구름 위를 날았다.


도착할 때쯤이 다 돼서 창문을 걷어올렸다. 날씨가 좋지 않아 구름만 보였는데, 점점 비행기가 하강을 하면서 구름이 개이더니 구름 아래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엥? 이게 아프리카라고? 나는 너무 놀라 급히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나이로비의 풍경은 정말 뜻 밖이었다. 나는 당연히 초원이나 드넓은 들판 같은 곳에 착륙해 한참을 걷게 될 줄 알았는데.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인디아나 존스나 쥬만지 같은 느낌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난 아프리카는 상상했던 것과 완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공항버스가 마중 나와 있었고, 우리를 싣고 입국심사하는 건물 앞까지 데려다줬다. 입국심사를 하기 전에 화장실에 들렸는데, 화장실도 너무 청결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았다. 다행히 짐도 누락된 것 없이 모두 잘 도착해 있었다.



현지 기사님이 우리를 픽업해 오기로 해서 우리는 예정되어 있던 약속 장소인 공항 내 있는 작은 커피숍에서 기다렸다. 한참을 멍 때리고 있는데, 내 캐리어 가방이 살짝 열려 있는 게 아닌가! 그 가방이었다. 급하게 정리를 하느라고 열려있던 거겠지, 하며 가방을 열어 확인해보는데 다행히 노트북은 그대로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빠진 물건은 없는지 다시 천천히 살펴보는데, 1 테라짜리 외장하드가 없어졌다. 공항에서는 다시 안으로 못 들어간다고 하고 기사님은 이미 도착하셨고, 나 때문에 지체할 수 없어 어서 출발해야 했다. 그동안 해왔던 내 대학생활의 작업들이 모조리 공중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아빠가 짐 관리 좀 잘하라고 그렇게 잔소릴 했는데. 그래, 그래도 노트북이라도 건진 게 어디야.



나는 차에 탈 때 시야가 탁 트인 걸 좋아해 앞자리나 창가 쪽 자리를 선호하는 편인데, 그날도 어김없이 내가 앞자리에 앉았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보이는 것마다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 나이로비 공항을 빠져나와 도심으로 가는 고속도로에는 대형 광고판들이 있었는데, 삼성과 엘지의 휴대폰 신제품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인이긴 한 건지 괜히 뿌듯했다. 한참을 달려갔다. 도심가 주변에 들어섰는지 대형 아울렛 같이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주일치 장을 보고 이동하기로 했다.



케냐는 검문이 참 까다로웠다. 차가 들어가는 마트 입구에도 검문이 있었고, 사람들이 들어가는 건물 입구에도 검문이 있었다. 군인인지 경찰인지 모를 그 사람들이 총을 갖고 있고, 완전히 무장한 채 입구를 지켜서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라서 되게 낯설었다. 가방 검사를 마치고 특별한 제지 없이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간 곳에는 엘리베이터도 있고, 홈플러스처럼 몇 층으로 구성된 대형 마트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식수와 각종 음식 재료들을 구입했다. 짐을 한가득 싣고 빠져나왔다.


점점 사람들이 많은 도심가로 들어섰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빽빽한 도로와 매연, 심지어 교통체증까지. 동그란 교차로에서는 차들은 서로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크락션을 울려댔고, 나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아프리카에 차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버스 안에도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이렇게 많은 아프리카 사람을 보는 것도 처음이어서 그랬는지 모든 게 다 신기했다. 사람들의 걸음걸이, 자전거 타고 다니는 모습, 길거리 상점들, 차 안에서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꽤 재미있었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수십 명이나 되는 동양인들이 한데 모여 탄 버스를 몇 번이나 봤을까?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사람들이 “잠보!”하고 인사를 했다. 원래 알고 있던 사이인 것 마냥 너무 반갑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 쟤 갈 길을 갔다. 우리는 한국에서 외국을 봐도 말을 걸거나 하지 않는데, 왜 지나가는 사람마다 인사를 그렇게 잘하는지. 그때는 아프리카 사람 특유의 친근함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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