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천금이야”
'시간 플렉스'를 예방하는 한마디의 처방
언제 어디로 사라진 걸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목덜미를 차갑게 할퀴어대던 그 거센 녀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간지럽기까지 한 공기가 나의 얼굴을 쓰다듬는 오늘은 3월의 중순, 그리고 시곗바늘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오후 3시를 향해 팔을 벌린다. 나는 별 일 없는 지금을 별 것처럼 느끼면서 얼굴에 꽃을 한 다발 피운다. 이유는 단 하나. 지금이 바로 내 사랑하는 봄날이기 때문이다.
조금 부끄러운 일인 건데, 나는 사실 부지런함이 발동하는 계절과 시간대가 정해져 있는 사람이다. 특히 계절에 대한 차별이 심한 사람이다. 흔히 하는 말로 계절을 타는 걸 수도 있겠지만, 계절과 날씨에 대한 호불호가 뚜렷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으려나?
문득 되돌아보니 내 지난 청춘의 겨울들은 너무도 심심하고 잠잠했다. 마치 해마다 겨울잠을 자기라도 한 듯이... 스키나 보드와 같은 레저를 전혀 즐기지 않거니와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집채만 한 파도가 몰아치는 겨울 바다에 서있기란 그다지 낭만적이지가 않다. 그러다 가끔씩 눈이 내리면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예쁜 풍경 사진을 찍어 본다. 그 또한 잠시, 이내 질퍽해진 황톳빛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혼탁한 날숨을 길게 내뱉는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아침 루틴은 패스하기가 부지기수.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은 자주 이불속에서 사경을 헤매듯 무기력에 KO패를 당한다. 그러니 몸을 일으켜 세워 힘껏 스트레칭을 하고 창문 활짝 열어 환기를 하는 과정 또한 어렵다. 이토록 만사가 버거운 겨울날, 방구석에서의 내 유일한 낙은 영화 한 편을 틀어놓고 고당도의 간식과 함께 시들하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는 일. 자연스럽게 내 옆구리 살은 12월~2월마다 성수기를 찍곤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겨울이 유독 심한 편이고 그토록 좋아하는 계절 안에서도 무기력함은 불쑥 나타나 종종 나를 엄습하곤 한다. 이따금씩 무기력함과 싸우는 나의 실상은 매우 가까운 사람만이 알고 있을 뿐.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밝게 웃으며 일하는 내 이미지만을 기억할 뿐. 그래서 본의 아니게 '에브리데이 에너자이저'로 소위 요즘 말하는 부캐를 만든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얼마 전에는 내가 사용하는 블로그 내용들을 다시 찬찬히 한 번 훑어봤다. 활동 초반 대부분의 기록이 겨울이나 장마철을 껑충 스킵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토록 특징 있는 내가 내심 얼마나 웃기는지 모르겠다.
이토록 활동성에 기복이 심했던 내가 무기력과의 싸움을 제법 격하게 시작한 계기가 있었다. 서른다섯 2월 겨울의 생일 즈음, ‘내가 살아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다.’ 이런 유명한 명언에도 좀처럼 꿈쩍하지 않던 내 심장이 결국 ‘나이 듦’ 앞에서 움찔하는 게 아닌가.
새해인데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를 맞이하고 나니까 생각이 마구 흘러넘쳤다. 사회 제도 망이 정해놓은 청년의 바운더리 기준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의 공포, 하루라도 더 많은 추억과 성과를 부지런히 남기고 싶다는 심리적인 급박함마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람 습성이 달라지랴! 내 몸이 좀처럼 마음 같지가 않자 셀프 처방의 한마디를 등장시켰다. “잊지 마. 지금이 천금이야!” 이 한마디를 외치면서 나는 이내 정신적 배터리를 충전한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크게 입 밖으로 뱉어내면 신기하게도 내 몸에 활기가 생긴다. 스스로에게 표현하는 긍정적인 신념 구호가 상상 외로 많은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이로써 체감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나는 좋은 책에서 발견하는 한 마디로부터 무기력 퇴치의 도움을 얻곤 한다. 정확히 어느 날이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날도 무기력이 나를 살살 긁어대는 날이었다. 주특기인 뒤집기 놀이를 한참 하다가 엎드린 자세로 헤르만 헤세의 ‘어쩌면 괜찮은 나이’라는 책을 펼쳤다. 책 제목이 말해주듯 한창 ‘나이 듦’에 꽂혀 있었나 보다.
첫 장에서 그만 시선이 멈춰버린 건 왜일까. 나는 한 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헤세는 여든 살이 넘도록 살면서 삶의 모든 과정을 풍부하게 경험하고 이를 글로 남긴 작가였다’ 지은이 헤르만 헤세의 소개 첫 구절이 그의 작품 어느 수식보다도 멋졌다. ‘나도 헤세처럼 모든 시기를 풍부하게 경험하고 기록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특히 겨울철 아침에...’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 안타까움, 그리고 이어진 결심. 이미 엄청 많이도 허비해버린 과거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앞으로 살아갈 매일 매순간을 천금같이 여길 수만 있다면 아마도 내 삶엔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나의 해이함에 종종 망치를 들이대는 단 한마디의 주문 “잊지 마, 지금이 천금이야!”
어쩌면 이로 말미암아 올라간 내 부지런함 지수가 나에게 정말로 천금을 벌어다 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