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덕분이야"
미워도 그렇게 한마디 건네는 마음
상대에게 은혜를 베풀면, 혀끝의 독도 감사로 변한다 -그라시안
좀 많이 뻔뻔하다 싶었다.
어이가 없었다.
슬픈 미소가 번졌다.
말단 직원의 결과물과 성과를 마치 자기가 한 것인 양 남들 앞에서 들이미는 과장의 행태를 경험했다.
자신의 실수를 축소시키기 위해 아랫사람들 탓을 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대리를 보았다.
뭘 하면 하는 족족, 혹은 이유도 없이 밀착 군기를 잡아대는 주임은 너무 무서웠다.
매사 초진지 모드였던 어린 나에겐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는 상황들이었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었던 사회초년생 무렵의 일이다.
사회생활을 처음 경험하는 나에게 많은 것들이 낯설음, 불공정, 비효율로 다가오는 시기였다.
"제가 왜 그래야 하는 건데요?"
"도대체 왜 계속 이러시는 건가요?"
이렇게 대들면서 상사나 대표에게 도발할만한 스타일이 되지 못했다.
아니라면 조심스레 여우처럼 하지 않거나 피해 가는 술수가 있었어야 했다.
나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우걱우걱 해냈고
촌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며 모든 것을 인내하고 참았다.
열감 가득한 얼굴과 가슴팍에 여드름이 피고 그 풍성하던 머리숱이 줄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입꼬리 쳐진 웬 못난이가 나를 향해 찌푸려댔다.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 너덜너덜 조금씩 고장이 나버린 나는 벌써부터 퇴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올것이 오고야 말았다. 회사에 앉아 작업을 하던 내 가슴속에 마치 골프공 하나가 콱 물린 듯한 엄청난 통증이 찾아온 것.
식은땀이 나고 숨이 가빠질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주변을 살피는데 동료들은 외근을 나간 상황이었다.
마지못해 맞은편 (항상 얼굴 마주치기가 무서운) 남자 주임에게 인트라넷 메신저를 보냈다.
그간 작업 중 소리 내어 대화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던 까닭에 아픈 것 마저도 그렇게 알렸나 보다.
굉장히 까칠한 그였지만, 상황이 장난이 아닌 것으로 보였는지 나를 데리고 냅다 병원으로 향해주었다.
이윽고 어느 작은 개인병원에 도착한 나.
의사는 '아 스트레스구나!' 아주 성의 없는 짐작을 해대며 대빵만 한 침 하나를 겉옷 위로 꽂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청바지를 입은 채로 순식간에 아픈 침질을 당해버린 나. 그만 서럽게 펑펑 울어버렸다.
이상한 상사가 데리고 간 이상한 병원.
이상하게 통증은 가라앉았고, 주임은 조금 살만해진 나에게 국밥을 먹였다.
그러나 그 후로 매일 잔잔한 통증이 지속되자 결국 나는 몸을 사리며 회사에 작별을 고했다.
'안녕...'
내가 회사를 떠난 이후로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사업이 기울어 결국 폐업처리가 됐다는 소식, 다들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단 소식도 들렸다.
애증의 회사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픔을 만들어 주었던 회사도, 동료와 상사들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 흘러 5년이 지난 어느 시점의 일이다.
그때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주었던 까칠한 주임으로부터 페이스북 메시지가 와 있는 게 아닌가.
이유 없이 나를 갈군(?) 그날들은 내심 미웠지만, 손가락은 왜일까 그에게 반가움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화답하며 반기자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가 나에 관한 칭찬을 하기 시작한 것.
예전에도 일을 참 잘했었는데, 역시나 멋지게 성장한 것 같다며 간지러운 말을 해댔다.
사회생활 5년 차의 멘트일까. 애써 뱉어낸 형식일까. 어쩌면 진심일까.
갑분 칭찬모드에 살짝 당황한 나는 이 모든 것이 "네 덕분이다"라는 말을 건넸다.
어찌됐건 간에 우리의 대화가 예전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 조금 변한듯한 그의 언행, 그리고 내 마음속 살얼음은 녹아내렸다.
어쩌면 우리가 그땐 너무 어렸던 걸 지도 모른다.
특히 나는 더욱.
우리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났더라면 정말 심심할 뻔했다.
그가 얼마 후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네 회사 프로젝트에 나를 섭외하고 싶단 연락이었다.
거 참 팔짝팔짝 뛸 별일이었다. 미디어 PR 회사를 다니던 그가 나를 어드버토리얼 잡지 광고 모델로 섭외를 해주다니.
촬영 주제는 과일 다이어트, 방송 관련 직업인으로서 몸매 관리의 비결을 인터뷰한 뒤 사진 촬영을 하는 일정이라고 했다.
(그의 시선으로는 5년 전에 비해 나의 용모가 좀 더 나은 상태로 보였나 보다.)
그렇게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며 다시 함께 일하는 사건이 벌어지고야 만다.
한마디로 너무 고마웠다. 진심을 다해 감사를 표했다. '네 덕분에' 멋진 경험을 했다고.
이날 경력 덕분에 또 다른 섭외를 당하는 일들이 발생했기에, 그는 갑자기 은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종종 웃으면서 안부를 묻는 친구가 되었다.
만약 그날 다시 연락이 온 그에게 옛 감정으로 무심했거나, 유치하게 읽씹을 했더라면?
스스로 운을 살짝 걷어 찬 격이었겠다 싶은 생각에 웃음이 났다.
'네 덕분에'라는 표현을 사뭇 귀하게 여기게 된 계기이다.
상대가 밉든 좋든 간에 이 한마디를 건넴으로써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다만, 어감이 정말로 중요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삶의 행운과 기회들이 오롯이 '나 덕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타인을 높일 수 있는 아량이 오히려 나를 키우는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마치 행운의 부메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