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것은 내 마음 한구석에서 그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래빈드래나스 타고르
일하러 갈 때마다 언제나 함께인 나의 커다란 은색 손목시계. 행사의 사회를 볼 때에도, 강의를 갈 때에도 늘 나와 함께인 단짝이다. 사실 골드 액세서리를 했다거나 의상에 골드 단추가 있는 경우 시계도 그에 맞게 금색을 차면 좋으련만, 내게 아직 커다란 금빛 시계가 없다는 게 가끔 아쉽기도 하다. 그러니까 패션의 기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친구다.
얼굴이 커다란 시계를 차는 이유는 단 하나. 오로지 시간을 잘 보기 위해서다. 시간은 금이기도 하지만 나 같은 직업군에게는 그야말로 생명이다.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시작 시간, 쉬는 시간, 끝나는 시간쯤은 정확하게 지켜낼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
만약에 내가 어린 시절부터 시간을 철두철미하게 여기며 잘 지켜왔던 사람이라면? 나는 어쩌면 내 팔목 굵기에 제격인 작은 얼굴의 시계만을 줄기차게 차고 다녔을 것 같다. 즉, 나는 시간 지키기를 어렵게 느끼던 사람이었다. 코리안 타임이 어쩌고 저쩌고 애써 합리화를 시켜본 적도 있고, 내용물이나 핵심이 좋으면 늦는 게 만회가 된다는 둥의 생각도 해봤지만 종종 시간을 칼같이 지키지 못하는 스스로가 찝찝했다. 마치 하루 종일 애써 고아낸 설렁탕 국물에 먼지 하나가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일적인 능력치나 성과보다도 때로는 시간을 지키는 나의 태도가 많은 것들을 대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프로들의 세계는 생각보다 냉정하고 생각 외로 작은 디테일이 차이를 가름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시간 지키기'에 관한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젊음이란 글자가 한창 나를 들끓게 하는 시기, 내게는 노는 것 즐기는 것만큼이나 좋아하는 일을 더 잘 해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아주 큼직한 시계를 차기 시작했다. 남자들 시계와 맞먹는 크기다. 정장을 하든 캐주얼을 하든 웜톤을 입든 쿨톤을 입든 간에 내 시계는 변하지 않는다. 100년이 지나도 고장 나지 않을 만한 튼튼한 메이커로다가 차고 다니는데, 아마도 100년 이상 주야장천 일하며 살지는 못할 것 같아서 자손에게 물려줘야 할 것 같다.
"얘야 이 행운의 시계를 잘 간직하거라. 시간 개념은 실력이자 곧 행운이 되어줄 거란다!"
정말 시간 개념이 실력이자 행운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소심하지 않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적어도 여태껏 내 커리어에 있어선 자주 큰 도움이 되어주었기에...
이렇게 내 단짝이 되어버린 커다란 얼굴의 시계를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나태주 시인이다. 감성적인 시와 글을 참 좋아하는 내가 만난 최고의 행사 게스트이자, 유명인에 관한 나의 고정관념을 확 깨준 유일한 유명인이다.
나태주 시인과의 북콘서트가 있었던 작년 연말 그날은 유독 차가 막히는 날이었다. 서울 고속터미널 근처에서 인천으로 가려던 내차의 왼쪽 뒷바퀴가 펑크나는 순간, 커리어 역사상 최고로 아찔한 기분을 맛보았다. 처음 경험하는 일인 데다가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느낌마저 들었지만 이내 침착하기를 주문했다.
불현듯 떠오르는 근처 친구에게 SOS를 치고 가까스로 차를 얻어 탄 뒤 행사 주최 측인 대학에 양해를 구했다. "너무 죄송합니다.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시작 시간 거의 임박해서야 도착할 것 같아요. 행사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최대한 빠르게 가보겠습니다."
총알택시처럼 차를 몰아준 친구 덕분에 간당간당한 도착에 성공했지만, 정말 중요한 리허설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인님은 내게 첫인사를 건네며 예기치 않은 일이었으니 괜찮다며 위로를 해주셨다. 정작 나는 괜찮지 않았지만, 욕을 먹지 않은 게 정말로 감사한 일이었다.
리허설 시간을 지키지 못해서 스스로 노하고 있던 찰나, "시계가 크네? 커!"라며 아이스브레이킹을 해주시는 시인님 덕분에 가슴이 한번 더 울렁였다. "왜 이렇게 큰 시계를 차요?" 물으시기에 "그냥 시간을 잘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쥐어짜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대뜸 자신의 시계를 벗으시더니 "맞아요. 나도 그래서 이렇게 큰 시계를 차잖아요. 항상 눈에 시간이 잘 보여야 해~" 내 눈앞에 자신의 큼지막한 시계를 보여주시는 게 아닌가.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시간에 늦었다는 죄책감이 살짝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그 대신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사함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내 커다란 시계에 담긴 의미를 알아봐 주신 분이 등장했단 사실이 하나의 신기함으로 다가왔다.
"우리 또 만나요!"라는 멘트와 시집 선물을 건네며 미소 지어주신 시인님 덕분에 행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돌아오는 길, 행사가 끝날 때까지 나를 위해 밖에서 기다려 준 천사 친구에게 이날 선물 받은 시집과 시계 이야기를 풀어놨다.
구구절절 이야기를 다 들은 친구는 "멋지다!" 단 한마디를 건네며 열심히 차를 몰았다. 평소에 따뜻한 말 보다는 행동으로 정을 보여주는 시크한 친구인데, 외마디의 칭찬을 해주면서 웃어주기까지 하니 왠지 모를 간지러움이 올라왔다. 아마도 그때 내가 아이처럼 칭찬을 듣고 싶었나 보다. 늦게 도착해서도 헐떡 거림을 자제하며 게스트인 유명 시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사담까지 나누며 해피하게 일을 마쳤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여하튼 이날은 내게 좀 행운이었다. 좋은 게스트를 만났고, 너그러운 주최 측을 만나서 다행히 별 일이 없었다. 그리고 어려울 때 군말 없이 행동으로 도와준 친구 덕분에 나는 우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으며, 또한 친구의 외마디 칭찬 덕분에 앞으로의 난관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를 자세히 보아주신 나태주 시인님, 선물 받은 시집
찬찬히 되돌아보니까 이날 칭찬받았어야 할 사람은 나를 제외한 친구, 그리고 게스트 외 그곳을 지키던 관계자들이었다. 감정을 전혀 앞세우지 않고 침착을 보일 줄 아는 사람들, 촉박함 속에서도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던 사람들...
다시 한번 그날의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진심을 꼭꼭 눌러 담은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
정말 정말 정말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