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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관노 Jun 19. 2021

사랑해야 느낀다.

누구나 보는 것을 보고, 아무도 생각지 못한 생각을 해내는 사람이 있다. 처음 나는 이런 사람들은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그가 얼마나 그 대상을 사랑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랑은 대상에게 적극적으로 나를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 대상을 알려고 하고 나의 욕망과 합일을 통해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합일은 내가 대상을 알고 나 자신을 알아 마음의 융합을 이루는 것이다. 생각지 못한 생각은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런 융합의 경험에서 만나는 느낌이다. 잘 아는 시나리오 작가가 있다. 그녀는 지금 영화와 방송 드라마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다. 이 작가의 작품 과정을 보면 사랑 없이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 작품을 구상하고 작품과 주인공이 결정되면 작품을 쓰기 위해 먼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을 한다. 자료 수집은 매체에만 의존하지 않고 현장을 찾아가 자료를 찾고 관계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는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현장을 찾아가는 마음이 설렘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순간 대상이 연인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내가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대해 깊이 알게 되면 애정을 느끼고 사랑을 하게 되는데 이때가 되어야 비로소 작품이 써진다고 한다. 이렇게 사랑하고 대상과 합일이 이루어질 때 물음에 대답하는 글이 써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애정 없는 대상에 대해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느낌은 이런 애정 있는 관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다. 나와 사물로부터 분리된 벽을 허물고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됨을 극복하게 하면서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통합성을 유지 시킨다. 이러한 통합성이 우리가 느끼는 새로움이다. 그러나 사랑이 통합성을 유지 하지 못하면 소유욕이 생긴다. 꽃을 보려고 하지 않고 꺾고, 공감하지 않고 강요하게 된다. 소유욕은 우리를 다시 불안과 고립감을 키우고 물질과 탐욕에 쫓겨 다시 수동적이게 한다. 능동성이 활동을 의미하다면 수동성은 활동을 멈춘 자기감정이다. 능동적일 때 우리는 자유롭고 자기감정의 주인이 되어 느낄 수 있지만, 수동적일 때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 즉 물욕과 탐욕에 의해 움직이는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며,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어 주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고 가난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랑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잠재력의 최고의 경험이고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생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잠재력이 대상에게 갖고 있는 애정만큼, 우리는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우리의 눈은 모든 것이 저절로 보이는 게 아니라 관심을 가질 때 보이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나 있어도, 어떤 것은 잘 보이지만 어떤 건보이지 않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어느 순간 저절로 선명하게 보이게 되는 것을 경험한다. 포기하고 아무 생각 없이 있으면 저절로 선명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애정의 싹이 텄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인다고 보고, 안 보인다고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뭔가 보고 못보고, 느끼고 못 느끼고는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 아는 만큼 보고 느끼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만큼 보고 느끼는 것이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가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듯이 내 일에서 매일 새로운 느낌을 느끼지 못한다면 자기 일에 대한 사랑을 의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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