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공 아파트 입구에 위치한 필성 슈퍼를 운영하는 아빠 엄마는 같은 업종인 이름도 엉터리 같은 엉터리 마트의 오픈 소식에 마음이 심란하다
단골이던 동네 주민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서로가 눈치를 보는 불편한 관계로 점점 벌어지고 있다
고모가 필성 슈퍼를 넘겨주면서 함께 주었던 매뉴얼 노트의 지시대로 머리를 맞대며 묘책을 찾아보았지만 경쟁사 마트의 변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 3 여름이 끝날 무렵 할머니는 선 긋기를 떼고
자음 공부에 들어갔다
한 획을 긋는 것조차 힘겨워 하던 지난여름에 비하면 괄목한 성과다
할머니가 주시는 매달 수업료는
은동의 비밀 비자금으로 차곡차곡 쌓인다
'기쁨과 두려움이 동시에 다가오는 기분' 나는 일기장에 그렇게 썼다
할머니의 비밀 한글 수업으로 받은 수업료를 차곡차곡 모으는 은동 이 행동 자체가 이미 기쁨으로 보였다 비밀이라는 무기가 지닌 기쁨의 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은 오롯이 혼자서 성공의 고지에 가기 위한 헌신이요 고난의 길이기에 그 기쁨의 질을 양으로 따질 수 없을 수 있다 그 비자금의 사용 대상이 가족이든 친구든 자신이든 상관없이 조금씩 쌓일 때마다 기쁨도 함께 쌓이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은동은 기쁨과 두려움이 동시에 오고 있다고 했다
왜일까? 기쁨과 슬픔은 동전의 양면처럼 왔다 갔다 하는 추의 성질을 갖고 있다 비자금이 발각될 우려의 두려움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은동 마음속의 두려움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은동은 두려움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고, 또 그 두려움을 이겨낼 마음의 준비도 되었다고 느껴졌다
나 또한 나만의 비자금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공식적 명목은 아이들 학자금 모음이긴 하지만 사실 더 깊고 깊은 곳엔 나를 위한 행복한 시간을 만나려는 하나의 도구이다 비자금의 가장 큰 두려움은 비밀이 더 이상의 비밀로써 가치가 떨어졌을 때일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고 들 말한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날이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한다
지금 당장 권하고 싶다 당신만의 비밀을 만들어 보라고.....
돈이든... 꿈이든... 소유욕이든... 욕망이든....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하루하루가 당신을 만나러 올 것이기 때문이다
- 글쓰는 말뚝박이 생각-
필성슈퍼는 '두부 한 모라도 배달' 이후로 매출이 상승했다라기보단 정말 두부 한 모만
주문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중에서 콩나물 오백 원어치와 우유 한 팩을 주문한 502호 아주머니는 5층에서 샛노란 바구니를 천천히 내리며 그물 물고기잡이 어부가 된다
거스름돈과 주문한 콩나물과 우유를 바구니에 넣고 양팔을 크게 모아 동그랗게 싸인을 주면
둥근 달처럼 천천히 올라간다
"고마워요 공주"
공주라니? 민망하지만 싫진 않다
가끔씩 바구니 안에는 선물도 함께 넣어 주신다
아주머니가 직접 만든 머리끈이나 목도리다
가까이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가장 가까운 손님이기도 했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고 김장철이 시작됐다
필성 슈퍼에 걸려 있던 '두부 한 모라도 배달' 목걸이는 '배추 한 포기라도 절여 드립니다'로 바뀌었다
고입 선발고사가 다가올수록
은동의 비자금이 점점 쌓여 갔다
고입시험에 대한 불안 보다
쌓인 돈을 들고 버스를 타고 간다는
설레임에 가슴이 뛰었다
버스를 탄다는 건 어딘가를 가겠다는 의지이다
그곳을 가기 위한 절대적 타당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고입 특별반에 들어가야 한다
이제부터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 다짐한다
절인 배추 주문으로 온 가족이 필성 슈퍼로 총출동이다
막내 은결이까지 고사리 손도 소중하다
근처에 사는 응옥아주머니까지 일손을 돕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온 응옥 아주머니의 남편은 멀리 타지에서 일하다 가끔씩 집에 온다고 했다
물건을 사고 도망가기 바쁘게 가게 문을 나가던
응옥 아주머니를 엄마는 붙잡으며
놀다가라고 하면서 친해졌다
바쁜 슈퍼 일에서 응옥 아주머니 덕에
입시생 대우를 받게 되었다
겨울이 시작되고 김장철이 끝나 갈 쯤
할머니의 자음과 모음의 합쳐진 글자 공부로
한 단계 올라갔다
우리의 '두부 한 모라도 배달'은 계속 이어졌고 눈 발이 하늘만큼 쌓이는 날에도 밥값을 하라며
은세 언니와 나를 할머니는 억지로 등을 밀며
필성 슈퍼로 내 몬다
"왜 우리가 아침부터 일해야 되는데....."
은세 언니가 짜증을 부려도 소용없다
기울어져 가는 필성 슈퍼에 도움을 주고자 빨리
한글을 알아야겠다며 할머니는 한글 수업을 일주일에 세 번에 만 오천 원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름 석 자도 모르는 빙신'
황서은 할머니의 이름이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서운하다고 해 서운이라고 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주민등록상의 올려진 이름엔 분명 황서은이였다
팔십 평생 서운으로 알고 있던 이름이 서은이란
세련된 이름의 소유자로 바뀐 자신이 좋으면서도
망설여진다고 했다
"서운이가 나 같어야, 희한해야"
막상 이름을 바꾼다고 생각하니 자신을 어디론가 멀리 떠나보내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