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대화하기

[작은 빛을 따라서_권여름 지음] 2부

by 이화


[2부_ 꿈의 기능]

고등학교 오리엔 테이션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특별반 1반에 석희가 보였다


특별반 1반에 들어 가지 못한 이상한 패배감은

나의 고유한 '나'가 사라지는 공포감이었다


'만 원짜리 헐어야겠네' 할머니는 만 원을 써야 할 땐

꼭 '돈을 헌다'라고 표현했다


서점 예술 코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띤 [배우 되기] 한 권을 샀다


"그래. 열심히 해. 개성파 배우가 되겠어"

서점 주인의 칭찬인지 격려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들으며 애써 신경 쓰지 않고 계산했다


입학 후 연극 동아리에 가입을 하면서

본격적 배우 되기를 실천했다


다른 세계에서 살 것 같았던 석희가 연극동아리에

가입을 하지만 뚜렷한 이유도 설명도 없어

절친이 맞는지 머쓱해지기 시작한다


토론과 토의만 진행하던 연극동아리에서

벚꽃 축제가 한창인 천변으로 소풍을 나간다


초등 시절 섬에 살던 우리 가족을 고모의 초대로

벚꽃 축제를 구경했던 장소이다


그때 벚꽃 보다 하얀 조명으로 반짝거리는 가게들을 구경하다 석희를 보았고

아직 석희에겐 말하지 못 한 말...


'너 때문에 나 미아 됐었잖아'

석희에게 시선을 뺏겼던 시점

열 명이 넘는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고

내가 없어진 줄도 모른 체

집으로 갔다가 도착 후에야 나의 사라짐을 알았다는

하마 터먼 무서운 결과로 이어질 뻔한

추억이 생각났다


저 멀리 잰 걸음으로 아빠와 비슷한 체격의

아저씨가 보였고 단박에 아빠임을 알아보았다

아빠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가게를

두리번 찾고 있었고 나는 속으로

'아빠'를 외쳤지만 차마 달려 가진 않았다


요란한 뽕짝 음악이 흐르고 장구 연주를 하던

각설이 앞에 아빠는 물건을 놓고 바쁘게

다음 행선지로 사라졌다

노래와 장구가 절정에 다다를 즘 석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동아리원들과 선생님 모두가 모여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했고

노오란 호박엿을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토론과 토의만 하던 연극 동아리는

세상을 알아야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계속 이어갔다


학기 말 드디어 연극 수업으로 심청전이 기획됐다

할머니의 한복을 빌려 입고

얼굴에 점을 크게 찍고는 뺑덕어멈이 되었다


"타고났네. 타고났어"

이 말은 칭찬보다 내 안의 재능이 훼손될

우려가 없다는 타고난 감각이 퍼진

나의 DNA의 황홀감처럼 들렸다


이 고장은 너무 심심했고 뻔한 걸 요구했다. 뻔한 이유로 누군가는 학이, 누군가는 닭이 되어버리는 세계. 이곳에 이대로 있다가는 수많은 닭 중 하나가 되어 좁고 더러운 양계장 한구석에서 꾸웨엑 소리만 내다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언어로 내 꿈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대신 내 안에서 조용히 몸집을 키우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택했다

내 꿈을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본문 중에서-
나의 하노이 생활은 뻔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밥을 차려주고 집안일을 하고 가끔씩 쇼핑을 하고 친한 엄마들과 밥을 먹곤 했다
나는 심심했다
하루 종일 빈둥빈둥할 일이 없는 심심함과 할 일이 줄줄줄이 뒤로 계속 있어도 심심한 사람과의 갭 차이를 소분하여 구분 짖고 싶었다

집안일을 중간중간 끊지 않고 몰아서 한다면 아마도 오전 중으로 모든 걸 다 해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 중 반나절의 황금 같은 시간을 선물받을 수 있다
하지만, 5분 대기조로 살아야 하는 전업주부에겐 조각조각 부러진 시간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현실적으론 긴 호흡이 필요한 몰입은 할 수 없다
초인적인 집중과 열정이 조각 시간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가능 한 사람이 있다면 그 건 열정보다 분노에 가까울 수도 있다

미적 미적 몰입이 필요 없는 가벼운 것들로 조각 시간을 채우며 나름의 변명으로 심심할 수밖에 없다며 숨어버렸다

숨어만 있다 보니 크게 숨 쉬는 법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있다간 누구의 엄마, 누구의 배우자 딸랑 역할만 남기며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갈 것 만 같았다

부러진 조각 시간들을 이어줄 뭔가가 필요했다
시간을 이으고 이으다 보면 숨을 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숨을 마시고 내시는 공기 사이로 몰입할 수 있는 꺼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숨을 쉰 지... 3년이 흘렀다

나도 갖고 싶은 꿈이 생겼다
나에게도 갖고 싶은 나의 미래가 생겼다
나의 이름이 존엄적 가치로 인정받길 원했다

가슴으로 진정 나를 끓어 안았다
차가운 머리엔 유니크한 세포와 뜨거운 가슴엔 섬유질 근육의 합이 나를 단단한 트랜스포머로 변신시켜 주었다

영화 속 트랜스포머는 세상을 구한다
나는 나를 구원한다
내 꿈의 세상으로 데리고 갈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글쓰는 말뚝박이 생각-

여름을 앞두고 필성 슈퍼는 물놀이 손님들로 북적였다

수박 모형 튜브가 대롱대롱 바람에 살살 흔들 거린다


할머니는 수박 튜브를 볼 때마다

수박은 고창 할아버지 집 수박이 제일 맛있다며

돈 주고도 못 먹는 수박이라고 했다

고창 할아버지는 육지에 몇 안 되는 할머니의 혈육이다

한글을 조금씩 읽기 시작하면서 할머니는

고창 할아버지 댁을 다녀올 자신이 생겼다며

고창 글씨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고창, 써진 대로 가면 되잖냐? 뭐더러 넘헌티 물어 바야?"

그러나 늦은 저녁이 되어도 도착하지 않는

할머니를

가족 모두 초조하게 기다렸다



은세 언니는 아빠 차에서 내리자마자 삐죽삐죽 눈물을 흘렸다. 평소에는 할머니 말은 더럽게 안 듣더니 눈물은 참 많다
-본문중에서-

어둑 어둑한 밤 천천히 걸어오는 할머니의 얼굴은 태평했다


"집에 오는 버스 까정 옳게 타니까, 가슴이 훤해지고 어깨가 따악 퍼지더란 말이다. 인자 고창이 문제것냐. 전주며 서울이며 못 갈 것이 어디겄냐. 버스서 내려가지고 택시 탈라고 터미널 앞에 섰는디, 옴마! 눈 앞 간판 글자들이 '할메' 하믄서 손을 흔들어야. 그것이 다 읽히는 거여. 저놈까지만 읽어 보고 타자. 앞에 두 군디만 더 쳐다보고 가자 한 것이 점드락 걸었지야. 다리 아픈지도 모리고 꼭 구름 우를 걷는 것 같았시야."
"부런 사람이 읎다"

부러운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나는 알아들었다. 나 역시 뺑덕어멈 되고 처음 느낀 감정이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꿈은 부러운 것이 없게 만든다

-본문 중에서-
꿈은 부러운 것이 없게 만든다

이 말이... 너무 좋았다
글을 모르고 살던 할머니가 글을 알기 시작하면서 상가 간판 글자들이 손을 흔들어 준다며....
따라가다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른 체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라고 했다

글을 알아야 했고 글을 읽고 싶어 했던 할머니
인생의 작은 소망으로 시작해서 꿈으로 이어진 더 이상의 부러운 사람이 없다는 할머니....

꿈이란 그런 것일까?
몸과 마음이 투명한 솜털이 되어 훠이~~ 휘이~~
고통의 칼날이 들어와도 어느 한 곳 다치지 않게 하는가?

은동이 할머니의 말을 알아들으며 꿈의 기능이 점점 부활하며 다가오는 설렘이다

-글쓰는 말뚝박이 생각-

특별반 폐지에 연극 동아리 선생님의 1인 시위가

여름 보충 수업 때부터 시작됐다

'비교육적인 특별반 폐지!

2학기 교육 정상화를 희망합니다'


담담하게 동참을 못 하겠다고 거절하는 석희와는 달리 나는 특별반 반대에 찬성은 하고 있었다

다만 교문 앞에 서 있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의구심에 시위 참관은 원하지 않았지만 못 하겠다는

거절도 하진 못했다


여름이 되자 엉터리 마트는 폐업을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더 거대한 마트가 입점할 거란 소문에 아빠는 슈퍼 연합회에서 나눠 준

빨강 조끼를 입으며 시위에 나섰다


아빠는 슈퍼 연합회 활동으로 슈퍼를 자주 비웠고

아빠의 빈자리는 고스란히 우리들 몫이 되었다

아크릴 판 안에 쓰인 '외국계 대형마트 허가 반대'라는 글이 눈에 띄었다


주민들에게 '허가 반대 서명지'에

많은 사람들의 동참만이 살길이라며

배달을 할 때마다 배달보다 더 힘든 걸 받아 와야 했다


여름이 지나고 단풍의 계절 가을이 되면서 정읍시는 대형마트 허가 불허를 공식적으로 공개했다

'골리앗을 이겨낸 작은 가게들' 이란 기사도 올라가 슈퍼 연합회 사장님들은 승리의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2학기가 되면서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석희는

연극 동아리에서의 위상이 흔들렸다

석희와 배프라는 친구의 역할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겨울 축제 때 올라갈 작품이 선정됐고

각 역할마다 오디션이 진행됐다


가급적 비중이 적은 역할에 오디션을 보았다

그러다 마음이 바뀐 건 엄마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사람이 맨날 하던 것만 하면 쓴데?"

-본문 중에서-
하던 것만 하고 살았다
용기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용기를 꺼내 쓸 줄도 몰랐다
아는 방법대로만 살 줄 알다 보니 새로움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하던 것만 하고 살아왔다

은동이가 심청이 역에 도전하듯 나도 작가라는 역할에 도전하고 있다
오디션을 봤다면 아마도 나도... 뻔했을 것이다
"이런 글을 누가 읽을까요?"

해 보는 거다
도전은 누구에게나 열린 창이고, 열린 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글쓰는 말뚝박이 생각-

은동은 심청이 역에 도전했고

오디션장 분위기는 모두가 은동을 심청이 역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그때 한 손에 대본을 들고 저벅저벅 걸어오며 석희가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했다


석희의 연기를 본 선생님과 동아리 원생들은

묘한 끌림에 압도당했다


심청이가 된 석희는 며칠 후 돌연

공연에 빠져야겠다는 발표를 했고 심청이 역할로

나를 포함 그 누구도 심청이 역할을 하기 싫어했다

결국

겨울 축제의 연극은 무산되고 말았다


드라마를 좋아하고 연극을 좋아해서 시작한 건

진심이다 다만 장학생으로서 의무로 해야 할

몇 가지 일이 겹치다 보니 무리하게 연극을 했다가

연극동아리에 피해가 될까 우려 되

급하게 포기하게 되었다는......


석희는 드라마와 연기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의 전 직업은 단역배우였고,

경제적 어려움이 너무 크다 보니

공부를 잘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석희와 같은 걸 좋아한다는 이유로

은동은 처음으로 은동의 꿈을 고백했다

방학이 되면 함께 전주에 있는 배우 아카데미를

가자는 제안을 석희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부푼 꿈을 안고 전주행 버스를 탔고

오디션을 보고 기다렸지만


"오은동 학생 연기를 꼭 하고 싶어요?"

"끼를 좀 더 키우고 오자. 응?"

나의 꿈은 흐믈흐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꿈에 대한 열기가 식어 희곡집이든 배우 책이든 모든 보기 싫어졌고

할머니의 한글 수업도 파업에 들어갔다


꿈을 잃은 자는 이토록 차가워질 수 있다

--본문 중에서-
너무 차디차면 자신을 얼어붙게도 한다
그러나
얼어붙은 영혼을 녹여 내는 봄바람은 또 불어온다

-글쓰는 말뚝박이 생각-

봄이 되자 엉터리 마트에 있던

자리에 대형마트를 몰아내고 텅 비었던

그곳에 신토불이 샘골 마트가 들어선다는

전단지가 돌기 시작했다


찬바람과 따뜻한 바람이 교차 대던 봄

샘골 마트는 나날이 번성했다


배우 아카데미를 다녀온 후로 나는 차갑게 변했다

나의 분노는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연기학원, 배우, 석희, 내가 꿈꾸던 꿈인가?


오랫동안 꿈의 둥지로 삼았던 그곳은 석희를 선택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분노는 공부로 향하고 있었다


현실 직시, 2학년이 되어 가장 많이 듣는 말이었다 여전히 그 현실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현실적인 방향인 걸까 가능성이 낮은, 어울리지 않는 꿈을 꾸는 것과 반대쪽인.

-본문 중에서-
현실적인 방향을 무시할 순 없었다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해 보니 나의 아이와 맞는 방향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초보 엄마 시절 동네 엄마들과 만나기만 하면 아이들을 어느 방향으로 키워야 하는지 현실적 정보에 정보를 더한 이야기만 하다 기운이 쏙 빠져서 들어 오곤 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걸 잘할 수 있는 기반으로 키우고 싶었던 나의 계획과는 달리 아이는 좋아하는 걸 찾지도 좋아하는 게 쉽게 생기지도 않았다

차라리... 현실적인 방향 노선에 올라타 필요한 공부를 하겠다는 말이라도 기다렸던 것 같다

현실적 방향이든 그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이든 어딘가를 향해 가겠다는 의지라도 분명해 주길 바랐던 것 같다

사실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나 또한 10대 시절 현실을 직시하고 인생의 방향을 몰랐던 그때를 생각해 보면 내 아이가 특별히 부족 한 건 아니었다

100세 시대 인생의 절반을 살고 있는 지금도...
현실적 방향은 매번 어렵다
현실적 방향 안에 나만의 길을 만들고 다양하게 수용하며 살아 내는 속도에 관심이 가는 요즘이다

-글쓰는 말뚝박이 생각 -

석희와 말을 트면서 배우 아카데미를

꾸준히 다니고 있었고


"나 요즘 너무 행복해"

라는 말에 무감정 호응을 해주게 된다


집으로 혼자 들어가는 길 내 내 석희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내 어깨보다 낮은 어느 집 담벼락을 지나며 생각했다 천장이 낮고 벽 한쪽이 허물어지는 낡은 왕국이라고 할지라도 어둠 속에 빛나는 장소 아무도 몰라줘도 내 안에서 빛나는 많은 이야기가 살아 있는 나만의 왕국 그것을 나는 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걸까 혹시 내가 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휩싸여 걸었고 저 멀리 우리 필성 슈퍼가 보였다

-본문 중에서-
며칠 전 큰아이는 취미를 다시 살려야겠다며 큰돈을 쓸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덜커덩 겁이 났다
큰돈이라니? 얼마나 쓰러고.. . 겁을 이리 주나...

한동안 손을 놓던 건담을 살 것이며 아주 희귀 제품이어서 값이 나간다는 구체적 설명을 해 주었다

이곳 하노이 인터넷 쇼핑몰은 물건이 도착하면 현장에서 택배기사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거금 5,000,000만 동 우리 돈으로 치면 250,000원가량 되는 돈이다

주문한 제품이 맞는지 또는 파손된 부위는 없는지 사실 확인 후 물건을 받고 돈을 지불하고 싶은 소비자의 입장과는 다르게 무조건 주문자만 확인되면 돈을 지불해야 되는 시스템이다

나는 아이에게 제안을 했다
직접 판매처에 가서 구매하면 어떨까?
아이는 오히려 그게 더 좋다며 함께 베트남 로컬 가게에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다

판매자가 알려준 주소를 그랩에 찍고 우린 어느 골목 입구에서 판매자와 만났다
얼추 이제 막 20살쯤 돼 보이는 베트남 남자는 자신을 따라오라며 골목길을 앞서 걸어갔다

우린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갔다
좁은 골목길은 오토바이가 겨우 다닐 정도로 비좁았다
베트남 남자는 오른쪽 왼쪽을 꺾을 때마다 우리가 잘 따라오는지 뒤를 돌아 보며 수시로 얼굴을 보여줬다

좁은 주택 길에는 각종 잡화 물건을 파는 가게를 지나 미용실, 빨래방, 식당, 옷 가게 등 주로 동네 주민들이 고객이 되어 오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베트남 시민들의 일상을 볼 수 있는 로컬 주택가에서 생뚱맞은 한국 사람의 등장으로 그들도 우리를 희귀하게 구경했다

골목길에서 놀던 어린 꼬마들의 눈과 입이 동시에 동그랗게 부풀러졌다

페인트칠 하나 없는 낡은 담벼락엔 민낯 회색 시멘트로 까칠해 보였다
여린 소등 하나만 켜져 있는 음식점은 쌀국수를 먹는 사람들의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다
도로포장과 하수구 처리가 안돼 울퉁불퉁한 좁은 골목길엔 버려진 오물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낡고 허물어질 듯한 그들만의 왕국에 들어온 나는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몰라 막연히 신발의 앞코에 시선을 고정시키곤 했다

동네 구멍가게로 모여든 아저씨들...
미용실에서 수다를 떨며 머리를 하는 아주머니들...
목욕탕 작은 의자에 앉아 쌀국수를 후루룩 먹는 젊은 사람들....
때 묻은 옷에 코를 닦으며 노는 아이들....
오토바이를 타고 노련한 운전 솜씨를 뽐내며 좁은 골목길을 씽씽 지나가는 행인들....
잘린 햇살에서 꾸벅꾸벅 졸며 볕을 쬐고 있는 노인들....

사람들이 사람들과 숨 쉬며 살아갔다
그들만의 빛나는 이야기 흐르고 있었다

허물어지고 보잘것없는 나의 그 어떤 것도 살아 있으면 된 것이다
나만의 빛나는 이야기가 가득 찬 나만의 왕국도 살아 있으면 된 것이다

-글쓰는 말뚝박이 생각-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필성 슈퍼로

가족 모두를 불러 내 엄마는 피자빵을 만들어 주었다


늦은 밤 502호 아주머니의 우유 주문은

서로가 배달을 가겠다는 품기 현상이 나왔다

은율이가 5층에서 둥근 바구니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환호를 지른다

샛노란 바구니가 둥근달이 되어

우리를 훤하게 비춰주는 것 같다


동네 주민들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필성 슈퍼의 눈치를 보며 샘마트에서 장보고

들고 오는 비닐봉지를 가리느라

공공칠 장 보기가 되었다


엄마 아빠는 이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부지런히 고민했다

우리들의 급식비며 문제집도 눈치를 보며 사야 했다


학구열이 넘치는 할머니는 한글 수업을 재개하길 원했다

위기의 필성 슈퍼를 구하기 위해 아빠의 입에서 '위도 장사'란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할머니의 글자는 전보다 더 힘이 생겼는데

그동안 은동은 무엇을 한 것일까


다음 편 [3부] 이어집니다

여기까지 글 쓰는 말뚝박이 작가 지망생의

책과 생각 나누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