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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hamo Jeong Jun 24. 2016

[남자찾아 산티아고 ①]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다가 있다


▲ [남자찾아 산티아고] 01.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다가 있다.ⓒ 정효정



남자를 찾아 산티아고에 가기로 했다.

산티아고는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산티아고, Jacob)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부의 도시다. 이 산티아고에 간다는 것은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뜻하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를 걷는 것을 말한다. 8세기 경 갈리시아의 한 수도사가 야고보의 유해를 발견한 후, 이 길은 가톨릭의 주요 성지순례코스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속죄받기 위해 이 길을 걸었다. 현대에 들어 이 길의 의미는 달라졌다. 오늘날 산티아고로 향하는 800km는 거리의 개념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현대인들은 건강, 자아성찰, 트레킹 등 다양한 이유로 이 길을 걸으며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길 원한다.

이런 의미 깊은 길을 나는 오직 '남자'만을 찾아 걷기로 한 것이다.




-▲ 산티아고로 가는 길- 가톨릭의 주요 성지순례이자 현대인들의 힐링여행으로 각광받고 있다.ⓒ 정효정




여행의 시작은 에세이스트인 지인과의 만남에서였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작가님께 전 남자친구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설명 중이었다. 밋밋한 이별이었다. 그저 웃으며 내 이야기를 듣던 그 분은 문득 손뼉을 딱 치며 말씀하셨다.  

"아, 아깝다. 나랑 산티아고 같이 갔으면 내가 좋은 남자 많이 소개해줬을 텐데!" 


귀가 번쩍 뜨였다. 그 분은 얼마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와 에세이를 쓰고 계셨다. 

"거기 괜찮은 사람이 많나요?" 
"당연히 많죠. 인생의 답을 찾아 800km를 걷는 여행자들이 모인 곳인데요."


'대체 괜찮은 남자(여자)는 어디에 있는 거야?' 

모든 싱글들이 가지는 불멸의 질문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 대답을 여기서 듣게 된 거다. 

가만히 머리를 굴려봤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최근엔 이곳을 찾는 한국인도 많아졌다. 산티아고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25일에서 40일 사이. 보통의 사람들은 하루 20~30km를 걷는다고 한다. 그리고 가는 길은 대부분 하나의 길이다. 그러다보니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사람들은 자주 마주치게 되고, 그렇게 인연이 맺어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고 한다.




-▲ 가득 놓인 부츠들 -함께 긴 길을 걷다보면 짝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정효정




무엇보다 "인생의 답을 찾아 800km를 걷는 여행자"라는 말에 내 심장은 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까다롭지 않고 여행을 좋아하며 삶의 태도가 진지한 사람,  내 이상형이다. 기본적으로 장기여행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까다롭지 않은 편이다. 무난하게 잘 자고 잘 먹는 타입들이 많다. 30~40여 일을 도보여행을 할 정도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답을 찾아 이 먼 길을 걷겠다고 결심할 정도면, 삶을 대하는 자세 또한 진지하지 않을까? 그래, 어쩌면 산티아고에 내 이상형이 있을 수도 있다. 

"산티아고에 괜찮은 사람이 많아요"라는 그 다정한 목소리는 어느덧 왜곡되어 내 귀에 이렇게 들리기 시작했다. 

"산티아고에 물이 좋아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다가 있다 

어느덧 산전수전 다 겪은 30대. 심지어 후반전에 들어섰다. 이제 택배로 온 이케아 가구 정도는 가뿐하게 혼자 조립하는 경지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좋아지는 것은 성격이다. 송곳 같던 20대와 비교하면 얼마나 많이 둥글어졌는지 모른다. 오늘의 내 성격이 내 인생 최고의 성격이고, 내일은 더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자신 없는 부분이 있다. 연애다. 이상하게도 분명히 성격에는 여유가 생겼는데, 연애에 대해선 아직도 20대 초반처럼 소심함과 엄격함을 고수하고 있다. 패인을 분석해보면 일단 연애패턴이 소극적이다. 늘 누군가 먼저 다가오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런 패턴에 위기가 오기 시작했다. 점점 다가오는 사람이 드물어지고, 그나마 더욱 엄격해진 '취향의 체'로 거르고 나면 남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는 것이다.



▲ 저기 가는 저 표지판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랑 함께 돌아갈꼬.ⓒ 정효정



가뜩이나 연애전선에서 밀려났다는 위기감이 드는데, 속 모르는 사람들은 엉뚱한 이야기로 내 속을 뒤집는다. 예를 들면 우리 이모의 이런 말이다. 

"얘, 넌 그 나이 먹도록 어장관리도 안 해두고 뭐했니?" 

당황했다. 나이가 들면서 실비보험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어장관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못해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억울한 게, 어장관리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장을 관리할 정도라면 그 정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가능하다. 

좋은 어장의 조건은 무엇일까? 욕지도의 가두리양식장을 떠올려보자. 일단 물고기가 모여들만큼 수질이 좋아야한다. 그리고 수온이 너무 높거나 낮아도 안 되고 물살이 너무 빠르거나 느려도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모여든 물고기가 떠나지 않도록 때맞춰 먹이도 던져주고, 어장을 둘러싼 그물에 빈틈은 없는지 관리도 해줘야 한다.



▲ 욕지도 가두리 양식장 - 어장을 운영하는 것엔 그만큼 수고가 따른다.ⓒ 정효정



나 자신을 물에 비유하자면 그다지 양질의 플랑크톤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고, 설사 물고기가 모여든다고 해도 때맞춰 떡밥까지 제공하며 관리할 부지런한 열정도 없다. '어장관리가 좋다, 나쁘다'의 이전에, 애초에 할 능력이 없는 거다.  

하지만 '어장관리'라는 말을 들으며 깨달은 점이 있었다. 만약 세상 모든 남녀에게 '자신만의 바다'가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연애상대는 그 바다에 찾아오는 물고기들인 것이다. 연애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물의 온도와 속도 등 바다가 가진 조건과 물고기의 종류가 맞아야한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나의 바다는 어떤 바다일까?" 

일단 송혜교의 바다와 나의 바다는 당연히 그 넓이나 깊이의 차원이 다를 것이다. 나의 바다는 나를 중심으로 200해리 범위안의 배타적 경제수역 정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한때 이 바다에 지나다니는 어종(魚種)이 꽤 풍부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걸 가두어 모으면 어장이겠지만 오는 물고기는 오는 물고기고, 가는 물고기는 가는 물고기일 뿐이었다. 연애전선에도 적당히 난류, 한류가 흘렀던 시절이다. 

하지만 어느덧 바다에 찾아오는 물고기가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온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유속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이따금 등장하는 물고기도 내가 관심 있는 어종이 아니다. 심지어 여기에는 있을 수 없는 심해어가 나타나서 나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어쩌다 도착한 물고기들도 수온만 체크하고 서둘러 떠나곤 했다. 

반대로 내가 물고기인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적극적으로 상대의 바다까지 헤엄쳐가서 탐험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갔다. 수면에는 종종 기름띠처럼 '부담스러워서', '지쳐서', '시간이 아까워서', '두려워서' 등등의 변명이 떠올랐다. 나를 둘러싼 바다는 이렇게 고요해지고 있었다. 


산티아고로 떠나기로 했다



나의 바다는 고요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짝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탓하기보다 이성을 탓하게 된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서로 '주제도 모르고 눈이 높다'며 비난하는 식이다. 

물론 이렇게 다투는 것도 다 서로에게 기대가 있을 때 이야기다. 어느덧 말을 섞는 것조차 시간낭비가 되는 순간이 온다. 사자가 토끼를 보듯 욕망에 가득 찬 시선이 아니라 기린이 얼룩말을 바라보듯 오리가 기러기를 보듯 상대방에 대해 무념한 시선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반자발적 수도승의 상태에 들어선 상태라 볼 수 있다. 

▲ 산티↗ 아고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낯선이여 나는 그대에게 아무런 욕망이 없다오.ⓒ 정효정


그렇게 세렝게티 초원에서 풀 뜯는 기린과 같이 무념하게 살던 어느 날, 위기감이 들었다. 대체 수도승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수도승은 죽으면 사리라도 나오겠지만, 내가 이렇게 무미건조한 삶을 살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변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했을 때, 전혀 의외의 곳에서 계시가 내려왔다. 

"산티아고에 물이 좋아요."  

그렇게 나는 산티아고에 가기로 결심했다. 누군가를 만나면 만나는 대로, 만나지 못하면 만나지 못하는 대로. 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평온한 내 심장에 활기를 불어 넣어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다. 

이 여정은 800km를 걷는 여행이다. 
그리고 나는 평소에 1km가 넘으면 무조건 택시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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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걷는 것을 싫어하는 한 여자가 2015년 9월에서 10월 사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제목이 어그로까미노CAMINO순례길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6월 22일에 개재된 기사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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