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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hamo Jeong Jul 14. 2016

[남자찾아 산티아고 ②] 개와 남자의 공통점

▲ [남자찾아 산티아고 02] 개와 남자의 공통점

ⓒ 정효정



"언니, 혼자 여행가면 진짜 남자 만날 수 있어요?"

후배들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묻는다. 아아, 보나마나 이 친구들의 머릿속에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상영되고 있을 거다. 단언컨대 그 영화는 판타지영화다. 실제로 혼자 여행해 본 사람들은 알 거다. 

안.생.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에 에단 호크 같은 남자가 없다. 그리고 이쪽도 줄리 델피가 아니다. 정확히는 썸이 생길 기회가 없는 게 아니고 내 타입이 나타날 확률이 드문 거다. 예를 들면 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처럼 흰셔츠가 잘 어울리는 남성이 좋은데, 현실은 늘어난 티셔츠에 북실북실 가슴털이 삐져나온 잭 블랙 같은 남자가 말을 거는 식이다. 



▲  영화 <비포선라이즈> 포스터. 혼자 하는 여행에 대한 잘못된 환상.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물론 여행 중에 인연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주변에도 몇 명 있다. 그들이 에단 호크나 줄리 델피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운 하나는 기가 막히다고 생각한다. 오며가며 만나는 그 수많은 인연 중에서 내 타입인 사람을 만나다니, 정말 드문 확률이다. 

그럼에도 남자를 찾아 산티아고로 떠나기로 했다. 사실 인연을 만나는지 못 만나는지가 중요하진 않았다. 찾지 못한다고 해도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남자가) 없는데 잃을 건 또 뭐가 있겠는가.

바꾸고 싶은 것은 연애를 대하는 내 태도였다. 언제까지 누군가 다가오기만을 내숭떨며 기다릴 것인가. 바다에 물고기가 없으면 원양어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가야하지 않겠는가. 비록 헛수고로 돌아올지 몰라도 분명한 건 하나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 자세로 살다보면 앞으로도 같은 결과밖에 없다. 아인슈타인도 말하지 않았나. 

"매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꿈꾸는 것은 미친 짓이다."



가장 대중적인 루트 '프랑스길', 사람도 많다


▲ 피레네산으로 가는 길 산에서 만난 개와 남자

ⓒ 정효정



그렇게 떠난 산티아고 순례 첫 번째 날, 인적없는 산길에서 한 남자와 개를 만났다. 시간은 오전 11시 반, 이미 다른 순례자들은 일찌감치 이 길을 지나간 터였다. 지금 이 산 속엔 나와 그, 그리고 그의 거대한 검은 개뿐이다. 날은 점점 뜨거워지고, 발도 저릿저릿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것보다 대체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걸까. 사실 난 오늘 출발할 계획이 없었다. 

전날,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프랑스길의 출발지인 생장(St.jean pied de port)에 도착했다. 언덕위에 위치한 이 고색창연한 성채도시에서부터 순례길의 가장 대중적인 루트 프랑스길(Camino Frances)이 시작된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프랑스길 외에도 은의 길, 북쪽 해안 길 등 다양한 길이 존재하고, 시작하는 지점에 따라 혹은 선호하는 루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프랑스길은 가장 대중적인 길이다보니 편의시설이나 정보가 많지만 그만큼 사람도 많다. 때문에 순례길을 여러 번 다녀 본 사람들은 프랑스 길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기피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프랑스 길을 선택했다. 목적이 목적이니 만큼 사람이 없으면 오히려 곤란하기 때문이다.  




▲ 생장피드포드의 야경 여기서 많은 순례자들이 길을 떠나 산티아고까지 간다

ⓒ 정효정



생장에 도착해 모두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니 순례자 사무실이 나왔다. 이곳에서 크레덴시알(Credencial)로 불리는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 위치한 고딕양식의 붉은 성당을 지나 알베르게(순례자 숙소)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 한 방에 2층 침대가 열 개. 스무 명이 한방에서 자는 구조다. 이제 내일 일어나서 길을 걷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막상 침대에 침낭을 펼쳐 놓는 순간 현실에 눈을 떴다. 이제 매일 잠자리를 바꾸며 아침저녁으로 이 침낭을 펼치고 말아넣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매일 공동욕실을 사용하고 매일 속옷을 손세탁해 어딘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널고 그리고 매일 20~30km씩 걸을 것이다. 

기세등등하게 여기까지 왔지만 스스로의 체력엔 회의적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며칠 걷다가 포기하는 상황이다. 내가 중간에 포기하면 "그것 봐"라며 박수를 칠 몇몇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나 모르게 자기들끼리 내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내 자존심은 어느새 고개를 들고 외치고 있었다. 

"중간에 포기하느니 차라리 첨부터 하지말자!"  

이놈의 자존심, 어느새 '못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낫다'며 날 설득하고 있다. 이 못난 녀석... 하지만 일단 출발을 미루기로 했다. 자존심의 꼬임에 넘어간 건 아니다. 내 저질체력에 대한 현실적 고민이었다. 



▲ 피레네산맥 1450미터 고지 콜 데 레피데르

ⓒ 정효정



산티아고 순례길의 첫 번째 코스이자, 가장 큰 고비는 출발지인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 가는 27km의 코스다. 해발 1400미터의 피레네 산맥을 넘는 만큼 전체 일정을 통틀어 가장 가파른 경사도를 지니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룬 영화 <더 웨이 the way>에도 주인공의 아들이 이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기상악화로 죽는 걸로 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걷기여행 초심자인 내가 배낭을 메고 산길을 27km나 걷는 건 무리다. 론세스바예스 가기 전의 유일한 숙소는 생장에서 7km 떨어진 오리손 산장이다. 하지만 듣기론 그곳은 숙소가 작은 편이라 출발 전날 미리 예약을 해두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 순례자 오피스에서 예약을 하고, 출발은 그 다음날에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날 오전 5시. 누군가의 알람이 울렸다. 밤새 남들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겨우 잠이 들었던 참이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기상나팔이라도 울린 듯 일사불란하게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침낭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버텨보고자 했지만 전투적으로 짐을 꾸려 나서는 산티아고의 전사들 사이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며 누워있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아직 해가 뜨긴 이른 시간. 마을 중앙을 흐르는 니베강엔 물안개가 자욱하다. 꿈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헤드랜턴을 켜고 씩씩하게 성문을 지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저들은 오늘부터 걷기를 계속해 언젠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닿을 것이다.




▲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해가 뜨기 전에 길을 나선다

ⓒ 정효정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좀 쓸쓸한 기분으로 안개 낀 성벽과 옛 건물을 홀로 헤맸다. 10시가 되자 순례자 사무실이 열렸다. 백발의 직원은 흔쾌히 오리손 산장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도와줬다. 

"오늘 오후 2시까지 오리손 산장에 도착해야 해. 안 그러면 네 침대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가니까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할 거야 " 
"음...? 난 내일 묵을 숙소예약을 부탁했는데?" 

내일 묵을 숙소를 예약하겠다고 했는데 그녀가 잘못 알아듣고 오늘 묵을 숙소를 예약해버렸다. 난 오늘 출발할 마음이 없으니 내일로 바꿔달라고 우겼으나, 직원은 다시 전화하기가 귀찮았는지 오리손까지는 7km니까 그냥 지금 가라고 날 설득했다. 

시간은 오전 10시 30분. 그렇게 아무런 마음의 준비없이 얼떨결에 길을 나서게 되었다. 그것도 입고 자던 면원피스를 입은 채로... 그리고 한 시간 후, 인적 없는 산길에서 개를 끌고 가는 남자와 만난 것이다. 




남자들이 물었다 "개와 남자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개 주인은 스페인 출신의 타고르, 검은 개의 이름은 토르다. 이 개는 등에 작은 개 전용 배낭을 지고 있었다. 타고르 말로는 자기식량은 스스로 지고 가게 한단다. 

타고르는 통성명을 하자마자 대뜸 내 사연부터 물었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이면 다 사연이 있지 않겠냐며. 별 사연이 없는 게 사연이긴 하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그의 사연은 뭔지 물어봤다. 그러자 준비했다는 듯이 4개월 전 헤어진 여자친구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정말 완벽한 커플이었단다. 두 명 다  동물, 특히 파충류를 좋아해서 함께 살며 20마리의 파충류를 길렀다고 한다. 파이톤도 두 마리나 있었단다. 

하지만 연애라는 것이 반려동물 취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만큼, 그들은 크고 작은 싸움을 반복하다가 헤어지게 됐다. 문제는 함께 키우던 반려 파충류들이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파충류들을 분양하거나 팔고, 마지막 남은 파이톤까지 넘기고 나자 그에게 남은 건 개, 토르 뿐이었다. 그러자 이 개를 데리고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의 연애담과 파충류에 대한 설명은 흥미로웠지만 나는 이미 속도가 뒤처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산을 안 다녀봤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등산용품은 엄마 걸 빌려온 거였다. 엄마 등산화, 엄마 등산스틱, 엄마 무릎보호대... '아마 엄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등산을 못가시겠지.' 프랑스의 한 시골길에서 잠시 엄마 생각에 잠겼다. 

고전하고 있는 나를 보던 타고르는 토르의 목줄을 내 배낭 허리끈에 묶어줬다. 그러자 졸지에 큰 개가 날 끌고 가주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이게 무슨 개썰매도 아니고, 내 무거운 몸뚱이를 의지하려니 개한테 너무 미안하다. 결국 토르를 풀어줬다. 싱글벙글 웃으며 지켜보던 타고르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 나를 끌고 가는 개 토르 동물학대인 거 같아서 얼른 풀어줬다

ⓒ 정효정

















"개와 남자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대체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걸까. 언젠가 유머사이트에서 본 옛날 개그가 생각났다. '개가 취한다고 남자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개그의 욕구를 지긋이 억눌렀다. 이런 질 낮은 개그를 치려고 이곳까지 온건 아니다. 대답을 못하고 있자 타고르가 말했다. 

"둘 다 충성심이 있다는 거지! 개는 한 번 주인을 섬기면 배신을 안 하거든. 남자도 마찬가지야,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서 애매하게 웃고만 말았다. 코너를 돌자 오리손 산장이 보였다. 이미 도착한 순례자들이 오후의 햇빛과 풍경을 즐기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천국 같다. 



▲ 오리손 산장 산장 수용인원이 적으니 반드시 예약을 하고 가야한다

ⓒ 정효정


이곳에서 충직한 타고르와 마찬가지로 충직한 개 토르와 헤어졌다. 언젠가 헤어지지 않을 진정한 사랑을 만나길 바랄 뿐. 샤워를 하고 저릿저릿한 발을 식히고 있는데 어제 파리에서 만난 친구가 메시지를 보냈다. 

"어때? 괜찮은 남자 좀 있어?"

그에게 개가 날 끌고 가는 방금 전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이렇게 답 문자를 보냈다. 

"개나 남자나. (Man or dog, same)"  

난 한 번도 이 둘을 연관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남자들은 자꾸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뜻밖의 출발을 한 산티아고 순례길 첫째 날. 남자가 아니라 나를 끌어주는 개를 만났고, 3시간 30분 동안 7km 걸었다. 아, 앞날이 막막하다. 













▲ man or dog 대체 개랑 남자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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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걷는 것을 싫어하는 한 여자가 2015년 9월에서 10월 사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개와 남자카미노까미노카미노데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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