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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hamo Jeong Jul 26. 2016

[남자찾아 산티아고 ③] 800km만큼의 자유

해 뜨면 걷고, 지면 쉬고... 걱정거리 없는 산티아고길



▲ [남자찾아 산티아고 03] 800km 만큼의 자유 ⓒ 정효정



"너 밤에 잘 못자는 편이지?"

싱가폴에서 온 제임스가 날 살펴보며 물었다. 오리손 산장에서 잠시 일몰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사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편이다. 몸이 피곤하고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하는데도 정신은 자꾸만 또랑또랑해지곤 했다. 깊게 잠들지 못하고 깨는 일도 많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놀라워하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내 나이쯤 되면 그런 게 보여. 넌 걱정이 많은 타입이어서 그래."

그는 64세였다. 하지만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그의 친구 티에스도 30대의 외모를 지녔지만 54세여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네가 여길 온 건 좋은 선택이야. 이 길을 걷는 동안은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거든."



▲ 오리손 산장의 아침 순례길 2번째날 오리손 산장에서 맞이한 일출ⓒ 정효정



그때는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여행을 마치고 생각하니 실제로 그랬다. 산티아고는 다른 여행과 달랐다. 과거 중앙아시아를 여행할 때는 매번 나라를 옮길 때마다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낯선 이름의 국경을 어떻게 넘어야하는지, 숙소는 어떻게 찾아야하는지, 현지 화폐는 무엇이고, 환율은 얼마이고, 현지 교통수단은 무엇인지 미리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산티아고에선 아침에 해가 뜨면 걷고, 걷다 지치면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를 찾아 머물면 된다. 서점에는 관련 가이드북과 에세이집이 넘치고, 생장의 순례자 사무소는 순례길의 고도와 거리, 숙소를 표시한 종이를 줬다. 심지어 여행정보가 담긴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도 있다. 길에는 친절하게 노란 화살표와 조개껍질 표시가 붙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그냥 그 사람들만 따라 걸어도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 걱정근심 없는길 화살표만 따라 가면 길이 나온다 ⓒ 정효정



모든 여정을 마친 후 되돌아보니 순례길을 걷는 동안 불면으로 고민한 날이 거의 없었다. 사실, 하루에 20~30km를 걷는데 어찌 잠이 안 오겠는가.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이 길 위에서는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800km. 이 거리는 그만큼의 자유를 뜻한다. 걱정은 넣어두고 이 길을 걷는 각자의 목적만 떠올리면 된다. 자기 자신을 찾거나, 인생의 진리를 찾거나 혹은 '남자를 찾거나'. 


숫자 37 아래에서  



피레네산맥은 악천후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출발한 날은 다행히 맑은 가을 하늘을 즐기며 넘을 수 있었다. 푸른 초원과 양떼가 어우러진 산을 넘는 기분 좋은 여정이었다. 중간에 스마트폰으로 외교부 문자서비스가 왔다. 위급한 상황이 오면 영사 콜센터로 전화하라는 내용이다. 어느새 스페인 국경을 넘었나보다. 

가장 높은 지점인 해발 1450미터의 콜데리포델(Col de Lepoeder)에 도착하기 전 즈음에,  1미터 단위로 숫자가 새겨진 나무 기둥이 보였다. 구조를 요청할 수 있는 번호라고 했다. 올해가 산티아고를 방문한 지 세 번째라는 한 미국인 여행자는 매년 자기 나이와 같은 기둥 아래서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61부터 시작해 올해는 63에서 찍을 거란다.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눈으로 기둥을 세면서 걷다가 숫자 37이 새겨진 기둥 아래 섰다. 언젠가 다시 온다면 저 숫자는 40이 될까. 50이 될까. 확실한 것은 두 번 다시 숫자 37 아래엔 서진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숫자가 앞으로 전진하는 것 외에는 경우의 수가 없다.


▲ 구조위치를 표시하는 기둥 다음에 다시 이 길을 걸을 땐 저 기둥아래서 사진을 찍을지도 모른다ⓒ 정효정



이제 본격적인 내리막이다. 그늘에서 쉬다가 한 스페인 여행자를 만났다. 숫자 37 아래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시간에 대해 떠듬떠듬 감상을 이야기 하는데 그녀가 말허리를 끊었다. 

"네가 37살이라고? 그렇게 안 봤어."

뜻밖의 칭찬에 기분 좋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해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버렸다. 

"아, 한국나이로 37살이고, 여기 나이로 35살이야."


말하면서도 '아차'했다. 한국의 연나이를 이야기하면 다들 신기해한다. 한국에만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설명하기가 복잡하다. 그전에는 뱃속에 있는 기간부터 세기 시작해서 태어나자마자 1살로 여긴다고 설명했지만, 한번은 '그럼 왜 9개월이 아니고 1년이냐?'는 질문을 들었다. 순간 나도 멈칫했다. 고민 끝에 이제는 서기로 설명한다. 예를 들면 '올해가 서기 2015년이니까 예수님이 태어난 지 2015년째가 되듯이, 올해는 내가 태어난 지 37년째 해'라고. 그러자 그녀가 물었다.

"그럼 넌 35살인데, 너희 나라에서만 37살 이라는 거지?"  
"그렇지." 
"그럼 2년 후에 다시 와도, 넌 다른 나라 기준엔 37세겠네."  
"음.... 그렇지."
"그럼 2년 뒤에 다시 37 아래서 사진 찍어. 이번엔 글로벌 스탠다드로." 

그녀는 스스로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드는 듯했다. 글로벌한 마인드를 가지는 것도 방법이긴 하겠으나, 어차피 나잇값이 요구되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큰 차이가 없을 거다.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그저 '보편적'이라고 생각되는 삶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이어도 나잇값을 못한다는 이유로 필요이상의 비난이 쏟아지곤 한다. 우리 사회에서 나잇값은 '나이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걸맞는 삶'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 나는 그냥 알았노라고 최선을 다해 미소짓고 말았다.



▲ 피레네 산에서 만난 양치는 할아버지 바스크지방의 모자를 쓰고 있다 ⓒ 정효정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요?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을 땐 오후 5시가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요?   넘었다. 전날 오리손 산장에서 묵기를 다행이었다. 만약 겁도 없이 하루만에 27km를 가고자 했으면 아마 산을 다 못 내려와서 조난신고를 했을지도 모른다. 

가이드북에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는 옛 성당을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음산한 숙소를 예상했다. 하지만 외관만 오래되었을 뿐 실내는 200여 명이 한꺼번에 묵을 수 있는 쾌적한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각 층마다 큰 홀이 있고, 2층 침대가 붙박이식으로 도열해있다. 하지만 4인씩 공간이 나뉘어져 있어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샤워 및 식당, 자판기 등 편의시설도 완벽했다. 새로 리모델링한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한 느낌이다.



▲ 오래된 수도원을 개조한 알베르게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순례자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묵는다 ⓒ 정효정


이곳은 12세기 순례자를 위한 병원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유일한 숙소이기에 피레네를 넘은 순례자들은 순례의 첫날을 이곳에서 마무리한다. 입구에서부터 자원봉사자들이 체계를 갖추어 파김치가 된 우리들을 맞이했다. 이제 순례 1~2일차인 순례자들은 어리버리했지만 자원봉사자들은 능숙하게 신발장, 리셉션, 침대로 가는 길 등을 가르쳐줬다.

리셉션에서 크레덴시알 (순례자여권)에 도장을 찍은 후, 설문지를 하나 받았다. 국적, 성별, 종교 그리고 왜 이 길을 걷는지 등을 묻는 설문지였다. 보기에는 '종교적인 이유', '정신적인 이유', '문화체험', '스포츠활동', 그리고 '기타'가 있었다. 잠시 멈칫했다. 

매일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 이유를 묻는다. 자신이 걸으면서도 옆에 걷는 사람들이 신기한가보다. 사실 차로 다닐 수 있는 길을 매일같이 걸어서 간다는 건 '일상적이지 않은' 이유가 있어야 설명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저마다 이유가 있었다.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싶어서', '나 자신을 알고 싶어서' 등 삶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혹은 '유방암 4기여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서', '이혼을 해서' 등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길은 마치 오즈의 마법사로 향하는 노란 벽돌길 같았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이 힘든 여정을 걷고 나면 자신의 무언가가 변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실려있곤 했다. 아픈 마음이 치유되거나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알게 되거나 등등. 




▲ 론세스바예스 성당 저녁 미사후에 성당투어가 이어져 성당의 구조와 간단한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다 ⓒ 정효정



때문에 그런 진지한 이야기들 앞에서 감히 '난 남자 찾으러 왔어, 에헤헷' 하고 발랄하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도 나는 진지한데 상대방은 가벼우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모두가 성스럽게 생각하는 이 길에서 마녀로 몰려 화형당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위기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내 차례가 되면 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이 길을 걷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서"라고만 대답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결국 나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기타'에 표시했다. 믿음을 찾아 걷는 사람들, 영적 성숙을 찾아 떠난 사람들, '카미노'라는 독특한 문화를 체험을 하고자 온 사람들, 움직이는 것이 좋고 자연이 좋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 틈에 나는 '기타'가 되어 산티아고까지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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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걷는 것을 싫어하는 한 여자가 2015년 9월에서 10월 사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남자찾아카미노까미노까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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