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일기

03_ 편지

by 활짝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가는 곳, 특별하다고 느껴지는 곳으로 여행을 가게되면 주변인들의 주소를 모아 리스트를 만든다.

편지 보낼 사람들을 생각하며 어울리는 엽서를 산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꼭 찾아보는 것은 우체국이다.

여행지 근방의 우체국을 찾아보고 첫날부터 사모은 엽서에 틈틈히 적어 마지막날 그곳의 우표를 붙여 보낸다.

가까운 친구, 멀리 있는 친구, 그리고 가끔은 나에게도 쓴다.

여행의 끝에서 보낸 현지 우표와 직인이 찍힌 엽서를 여행이 끝나고 추억으로 받아본다.


평소에는 이렇게 사색할 시간을 만드려는 노력이 부족해서인지 좀처럼 편지 쓰는 일이 쉽지 않다. 그나마 꾸준히 하게되는 건 누군가의 생일이거나 축하할 일, 또는 작별, 그리고 크리스마스나 새해 카드 정도.


얼마 전 Loving Vincent를 봤다. 반 고흐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을 그린 회화 애니메이션이다. 100명이 넘는 화가들이 모든 장면을 직접 일일이 그려냈다는 사실이 입소문을 타면서 개봉전 부터 화제가 됐던 영화다. 수많은 사람들이 끈기를 가지고 그렇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장고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극장에서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지만 막상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감동은 기대만큼 크지는 않았다.

솔직히 그런 나 자신이 조금 원망스럽고 실망스러웠다. 이 영화만의 충격적인 스타일이 몇십분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빨리 익숙해지다니... 그러고나서 보여지는 고흐 죽음의 실마리를 따라 가는 여정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사건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과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영화는 살아있는 것의 힘 - 날 것과 가공된 것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107명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최종 프레젠테이션 됐지만 그 62450장의 그림을 하나 하나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사람들에게 영화보다 더 큰 감동을 줄거라는 개인적인 믿음이 있다.

영화로 기획된 작품이기 때문에 그 과정이 생략될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이 생략된 만큼 감동도 압축된 것만 같다.


나는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영화 끝무렵 엔딩스크립트에서 본 고흐의 편지글은 감동적이었다. 단편적이지만 영화를 통해 드러난 고흐의 인간적인 면모와 고흐의 편지,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고흐라는 인물을 간접적이지만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고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고뇌의 인생을 살았을지는 몰라도 주변에는 그를 믿고 지원하는 그를 사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생전에 한장도 팔리지 않은 그림을 죽을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그릴 수 있었던 고흐가 남았다.

작가의 이전글방학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