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구인가 잔다르크인가
누군가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버텨. 그럼 안하게 되더라."라고 조언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교장선생님은 "김선생님처럼 훌륭하신 분이 5학년 담임을 해 주시면 좋겠는데..... "라며 칭찬을 가장한 회유를 하시기도 했다. (이제 갓 발령받으신 교장선생님이 언제부터 절 아셨다고 ㅠ.ㅠ)
결국 결국 모두가 기피하던 5학년을 맡기로 결정한 나는 호구인지, 아니면 잔다르크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1. 교장, 교감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은근한 압박
: 나름 혁신학교라고 자부하는 곳에서 5학년이 기피학년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전입, 신입, 복직 교사에게만 이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 우리 학교만의 특색(?)이라는게 결국 사람을 통해서 전달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 게다가 김선생은 학년 희망서 쓸 때 1지망에서 밀렸으니 2~5지망은 건너 뛰고(?) 무작위로 가야된다라는 신박한 논리들을 들었다. 물론! 그 따위 논리들에 설득될 내가 아니었다.
2. 나름의 양심
: 이 학교에 첫해 전입해 왔을 때 독박업무, 기피 학년으로 개고생했던 것을 떠 올리며 나는 전입, 신입교사에게 독박씌우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그때 했었다. 처음 낯선 학교에 들어와서 낯선 업무, 기피 업무를 몰아 받으며 얼마나 화가 나고 외로웠는지 모른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내 선에서 끝내겠다,란 다짐을 하며 일년간 이를 갈았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 다시 기득권이 되었다고 똑같이 행동해서는 안되는거였다.
3. 엉뚱한 정의로움
: 편한 학년만 굳이 찾아가지 않겠다, 나름 중견 교사로서 신규들 앞에서 비겁해 지지 않겠다라는 엉뚱한 오기가 발동했다. 내가 신규일때 매년 편한 학년, 편한 업무만 도맡아 하시는 선배들을 뵈었을 때 속으로 얼마나 경멸했던가. 힘든 일들 신입에게 몰아 주고 월급은 더 많이 받으면서 편하게 지낸다면 내 자신이 부끄러울 것 같았다.
4. 근거없는 자신감
: 그래도 내가 경력이 몇 년인데, 나 정도 멘탈이면 힘든 아이들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근거없는 자신감.
귀엽고 착한 저학년들만 2년 내리해서 나의 현실 감각이 무뎌진 건지, 그 동안 너무 행복하게 살아서 낙관으로 가득 찬 것인지, 아니면 너무 지루해서 인생의 자극이 필요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이런 마음으로, 그 십자가 내가 한번 져 보겠다는 호기로움으로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