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뒷베란다에서 빨래를 정리하고 있는데 멀리서 내 폰이 울린다. 안에 있던 남편이 내 폰에 뜬 '부여엄마'란 이름을 보고 냉큼 전화를 대신 받았다. 여기서 '부여엄마'는 남편의 엄마다.
'부여엄마'가 며느리에게 전화를 거신 용건은 "묵은지 주랴?" 였다.
묵은지는 사실 어떤 집에서는 없어서 못먹고, 비싼 돈 주고 사서 먹어야 하는 귀한 음식일게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어머니는 손이 크셔서 김치는 자주, 많이 담그시지만 두 노인네만 사는 집에서 결국 다 먹지 못한 김치가 쌓여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유독 신걸 못 드시는 어머니에게 신김치는 처치 곤란한 음식이라는 것을.
다행히 남편은 자기 선에서 적당히 묵은 김치를 거절해 주었다. 사실 오늘 저녁도 묵은지로 끓인 김치찌개를 먹었으니 우리 집에도 김치는 많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요즘 젊은 여자들 답지 않게(?) 김치를 잘 담근다. 40대인 내 친구, 지인들만 해도 직접 김치를 담그는 이들이 하나도 없다. 다들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때가 되면 맛있게 담궈 날라주시기에 배울 필요도 없고 그만큼 맛을 내기도 어려울테니 말이다. 나는 타국 생활을 오래 해왔기에 어쩔 수 없이(?) 담그게 된 김치였다.
나에게 요리를 가르친 것은 8할이 유튜버였고 2할은 수많은 시행착오였다. 덕분에 지금은 혼자서 우리집 일년치 김장도 담그고 여름이면 오이소박이, 열무김치 등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 지금도 우리집 김치 냉장고에는 숙성도가 다른 김치 3종이 자리하고 있다.
'부여엄마'는 가끔 이런식으로 나에게 짬처리를 하신다.
예를 들면 작년 가을에 농사짓는 친척이 나눠 준 쌀을 올해 여름에 나에게 주셨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쌀벌레가 나오고 밥을 지어보니 푸석푸석 찰기가 하나도 없었다. 알고 보니 곧 수확철이 되니 어머니는 햅쌀을 사 드실 요량으로 묵은 쌀은 나에게 주셨던 것을 알게 되었다. 쌀은 여러번 주셨는데 한번도 멀쩡한 쌀이 없었다. 어떤 쌀은 알이 굵은데 과하게 익어서 맛도 없고 상품가치가 없어서 판매할 수 없었던 쌀이었고, 어떤 쌀은 겨가 너무 많이 섞여 있어서 일일이 손으로 골라내느라 진땀을 뺐다. 어떤 쌀은 초록색 알갱이, 즉 안 익은 쌀알들이 너무 많이 섞여 있었다. 마트에서는 팔 수도 없고 구경조차 못해본 쌀들이 어머니댁에서는 자꾸 오니 아마 누군가 농사 실패한 쌀을 얻어 왔거나 싸게 사신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또 한번은 고춧가루를 주셔서 김치를 담궜는데 너무너무 매운 고춧가루였다. 매운걸 잘 먹는 나도 배가 아플 정도로 매운 청량 고춧가루여서 우리 식구들은 먹지도 못하고 아까운 김치를 다 버려야 했다. 아마도 본인이 못드시니 나에게 주신 고춧가루였을 것이다. 처음에 잘 몰라서 넙죽넙죽 받아 왔다가 '이건 아닌데....'하는 현타를 몇번 느끼고는 이제 웬만하면 받을만한 것만 받아오게 되었다.
그래도 뭐, '부여엄마'가 나를 미워해서 그런것은 아니란걸 안다. 알뜰하게 살아온 노인이니까 멀쩡한 음식을 버리면 죄짓는다는 생각에 아마 그리 하셨을 것이다. 자신들이 먹기에는 너무 양이 많으니 자식들이 같이 나눠먹음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셨을 것이다. 사실 손이라도 작으면 괜찮은데 예전에 대식구 먹일 때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뭘 사든 조금씩 사시는 법이 없다. 두 식구 사는데 수박도 제일 큰거, 멸치도 몇 박스, 새우젓, 고춧가루도 10키로씩, 쌀도 몇 포대씩 사시니 늘 남을 수 밖에 없다. 자식들에게 계속 나눠줘서 우리집 냉장고에도 고춧가루, 새우젓, 기름, 각종 가루들이 한 가득 차지 하고 있다. 고기나 과일이라면 먹어서라도 없애지, 고춧가루만 퍼 먹을 수도 없고 새우젓은 아무리 먹어댄들 몇 년째 냉장고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사실 돈으로 따져도 꽤 귀한 것들이고 어머니의 정성과 마음을 따져도 귀한 것이니 이제 조금 철이 든 나는 그래도 감사함으로 이고 지고 있다. 그리고 그 정성에 화답하기 위하여 열심히 김치를 담그고 도토리묵도 만들고, 반찬을 만든다.
그렇지만 묵은지는 거절하겠습니다 어머니! 보나마나 달라고 하면 김치통 제일 큰걸로 주실거란거 알아요. 저도 이제 냉장고 미니멀리스트로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