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잘 지내셨어요? 저희 남편에게 전화하셨었다면서요? 얘기 들었어요. 저희 남편은 삼촌이랑 학생들 학교 견학 와도 괜찮은데 논문 게재나 실험 참여 같은건 해 드리기 어려워요. 일단 남편이 너무 바빠서 그 학생들 위해 따로 시간을 내기도 힘들구요. 남편도 입시 면접위원이나 출제 위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설 컨설팅 업체랑 관련이 있으면 청렴 문제도 생길 수 있구요. 아직 임용된지 얼마 안 되어서 조심스러운게 많은 점 이해해 주세요. 하지만 아이들 데리고 견학 오신다면 학교 구경 시켜 드리고 식사도 대접할게요. 한 번 오세요. 그리고 남편은 삼촌과 어찌 보면 남이지만 저는 혈육이고 삼촌과 더 가까운 사이니까 제가 얘기하는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제가 전화 드렸어요."
나의 이런 전화에 삼촌은 당황해 하시며
"아이구, 네가 오해를 했구나. 이번 건은 학생들 생기부랑은 전혀 관련이 없는거야. 나는 가능한지 한번 물어나 본거지. 어찌됐든 김교수가 부담이 되고 너도 마음이 불편하면 안하는게 맞지. 안해도 나는 괜찮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아라."
전화를 끊고 나는 나름 삼촌에게 공손하게 얘기했다고 생각했고 삼촌도 쿨하게 나를 배려해 주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것과 달리 삼촌은 그 당시 나의 거절에 상당히 마음이 상했었나 보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삼촌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한 번 만나자고.
별다른 의심없이 동생 집에서 우리 셋이 모였다. 이번에는 밥을 사주면서 또 어떤 부탁을 할까 싶어 만나기 전부터 마음은 불편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만나게 되었다.
삼촌은 역시나, 한 달 전에 내가 부탁을 거절한 것에 마음이 상해서 나에게 따지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삼촌의 화법은 삼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게 없었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너의 태도나 표정이 그게 뭐냐? 너는 원래부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너 같은 성격이 주변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 줄 아냐? 니가 뭔데 나를 단정짓느냐, 내가 너한테 뭐 바라고 이러는 것 같냐? 나는 어디가서나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람인데 넌 나에게 모멸감을 주었다. 나를 그렇게 대한 사람은 너가 처음이다."
중언부언 하지만 요지는 "너는 싸가지 없게 나의 부탁을 거절했으니 잘못을 싹싹 빌어라" 이고
주요 공격 수법은 {인신공격, 말꼬리 잡기, 인격 폄하, 말투와 태도 지적.}
보이지 않는 지원군 {실체를 알 수 없는 자신을 존경하고 따르는 제자들, 자기 주위의 잘 나가는 사람들}
오래 전부터 보아 온 너무 뻔한 수법과 화법에 실실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역시, 이 분은 변하지 않았구나.어쩜 옛날부터 그대로일까. 쿨하고 멋진 어른이 되고 싶지만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옹졸함, 자격지심. 스스로에게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 사돈의 팔촌, 수십년 전 제자들까지 끌어다가 훈장처럼 내세우는지. 역시 저 분은 나에게 관심도 없고 나를 1도 모르는구나. 나는 권위로 찍어 눌러봐야 전투 의지만 더 불타오르는 사람인데, 설마 내가 무릎 꿇고 싹싹 빌거라 생각한건가?'
한참 그 분의 얘기를 듣고 내 입장도 얘기 했지만 어차피 우리는 서로의 얘기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 애정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그의 훈계는 내 마음에 와 박힐리 없고, 오로지 나의 굴복만을 바라는 그의 뜻에 부응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지금까지 적립해 놓은 신뢰도 없었는데 삼촌은 나에게 어른 대접이 받고 싶으셨나 보다.
어떻게든 나에게 상처를 주려고 옆에 가만히 있는 동생과 비교를 하고 나의 말 꼬투리를 잡아서 공격하는데, 그 와중에도 삼촌의 훈계와 자기 자랑은 계속 도돌이로 끝나지 않을 듯 하여 나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어린 시절 따뜻한 격려 한번 없이, 항상 니 까짓게 하며 무시하던 아이들이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고 번듯하게 잘 사는 모습에 배알이 뒤틀렸던 것일까? 나를 아직도 삼심년 전 어린아이로 생각하고 자기 뜻대로 휘둘러 볼 심산이었을까?
삼촌의 독설이 하나도 타격을 주지 못했던 것은 삼촌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에게 타인보다 못한 의미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단단하게 자랐고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삼촌이란 존재가 나를 흔들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삼촌을 만났지만 역시나 삼촌은 나에 대한 애정은 한 톨도 없다는 것을 확인 했을 뿐이었다. 만약 내가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조카였다면 철저히 모른척 했을 텐데,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나를 만났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고는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이로써 불편한 만남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으리란 생각에 한편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먼 곳에서부터 조카를 혼내려고 찾아오셨는데 헛걸음을 치셔서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