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시집
진은영 시인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좋았던 표현들에 대한 기록.
1. <올랜도> 중
그러나 욕망은 악착같은 것
모든 재능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있다.
쓰지 않는 손이 줄 끊어지는 순간의 악기처럼 떨린다.
2. <그날 이후> 중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어울리는 엄마에게 검은 셔츠만 입게 해서 미안
아빠 아빠
나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뜨는 무지개 같은 아이
하늘에서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로 만들어줘 고마워
엄마 엄마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가장 맑은 노래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함께 불러줘 고마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3. <방을 위한 엘레지> 중
태양계의 세번째 행성이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듯
봄이 겨울을 이기고 온다는 것과 그 반대도 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뒤에 오는 것이 승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화성이여 지구를 이기길
내일이여 오늘을 이기길
썰물이여 밀물을 이기길
그러나 봄, 여름 뒤엔 다시 겨울이고
무지 노트와 지구본 연필깎이와 제본한 [예술의 규칙]을 한 줄로 늘어놓은
내 방 책상 위로
가장 나중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든 다른 것이 시작될 때마다
예언은 빛나며 빗나갈 테니까
'예언은 빛나며 빗나갈 테니까'라는 표현이 참 좋았다.
마치 인생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인생은 언제나 예상을 빗나가지만, 그 빗나간 과정은 언제나 빛나기 때문이다.
내 인생 대체로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하지만 빗나감 속에 더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고 그게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