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나침반을 찾아서 (고등학교 체육교사 이현우)
아.. 어쩌지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앞으로 뭘 해야 하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걸까? 반평생 운동만 하며 살아온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운동을 그만둔 후 들었던 생각이다. 이때의 나는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배와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나는 집 근처 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간 학교의 새로운 담임 선생님은 체육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나를 자주 불러 상담과 함께 학습에 도움을 주셨고, 나는 그런 선생님을 보며 체육선생님이라는 새로운 꿈을 갖게 되었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배가 나침반을 얻었다고 육지까지 올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운동부 생활을 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였었다. 이러한 경험이 육지까지 갈 수 있는 ‘나’라는 배의 엔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내게 축구는 종교와도 같았다. 축구공만 보면 달려들었고 공과 함께라면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내도 지겹지 않았다. 그래서 축구선수가 되기를 희망하며 연습하였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전문적으로 축구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축구교실에 들어갔지만 취미반이었기 때문에 축구를 향한 나의 갈증이 다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게 중학생이 되었다. 축구를 종교로 여기며 믿던 나를 하늘이 도우신 것인지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 축구팀이 창단되었다. 축구부 창단식은 그야말로 성대한 축제와도 같았다. 전교생들의 박수갈채와 악단의 팡파르 소리를 들으며 멋진 유니폼을 입고 입장하는 축구부원들은 너무나도 멋있어 보였다. 자연의 섭리처럼 나는 부모님을 설득하였고 축구부 입단테스트를 보고 축구부에 입단하였다. 처음 경험한 엘리트 체육은 어린 나에게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 집이 가까웠지만 다 같이 강제로 합숙을 해야 했으며 주말에만 집에 갈 수 있었다. 운동이 끝난 후 슈퍼를 가더라도 허락을 맡아야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손빨래, 빨래 널기, 빨래 개기, 밥상 차리고 치우기 등 집에서는 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일들을 직접 하게 되면서 서서히 나에게서 어리광이 빠져나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학교는 신생팀이기 때문에 정규수업을 모두 들었다. 7교시까지 수업을 듣고 운동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공부도 하고 싶어 했던 나에게는 더 잘 맞았다. 학급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학교생활을 했다. 나와 같은 학년이던 친구 중에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아이도 있었다. 그 친구가 졸업한 초등학교는 축구 명문이었는데 1학년 때부터 대부분의 수업을 빠지고 훈련을 하였다고 했다. 그 친구는 알파벳을 중학생이 되어서도 모를 정도로 학업과는 담을 쌓았고 당연히 수업시간에도 엎드려 잠만 잤다. 새벽 운동과 오후 운동 그리고 야간 운동까지 이어지는 고된 훈련을 참여한 축구부 아이들은 학교 수업시간에 매우 힘들어했다. 나도 피곤했지만 최대한 수업 중에는 깨어있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급에서 중간 이상의 성적은 유지할 수 있었다. 운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체벌이었다. 항상 엉덩이가 파랗게 멍들어 있었다. 심할 때는 의자에 앉는 것도 힘들 정도로 많이 맞았다. 그때는 체벌이 흔할 때라 학교 수업에서도 교과 선생님께 엉덩이를 맞게 될 때가 있었는데 축구부에서 맞는 강도에 비하면 매우 약해서 시원하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교실 청소에 사용되는 빗자루는 청소라는 소임을 다 하고 나면 축구부를 위한 사랑의 매로 역할이 바뀌었다. 빗자루의 나무 막대가 엉덩이 찜질로 인해 하루에도 2~3개씩 부러졌으며, 학교에서 사용했던 오래된 빗자루는 다 축구부 숙소로 모였다. 이러한 체벌의 문화는 당연히 축구부 학생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선배들은 후배들을 대할 때 보고 배운 대로 자연스럽게 폭력을 행사하였고, 후배들은 또다시 보고 배운 대로 선배가 되었다.
우리 팀 감독님은 운동뿐만 아니라 공부도 강조하셨다. 시험 기간에는 운동량을 줄이고 공부할 시간을 주었다. 시험점수가 떨어지면 엉덩이 찜질로 동기부여를 했었다. 나도 항상 시험 기간이 되면 시험공부를 했다. 취침 시간이 되면 합숙소의 불을 껐기 때문에 취침 시간 이후에는 감독님 방이나 복도 조명 밑에서 돗자리를 깔고 시험공부를 이어나갔다. 내가 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엉덩이 찜질을 피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보다 축구부에 대한 학급 친구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운동부 애들은 공부를 못한다’, ‘운동하는 애들은 멍청하다’라는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다. 운동을 하지 않는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서 몇 배는 더 힘들게 노력하고 있는데 이런 무시를 당하는 게 기분 나쁘고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다른 운동부 친구들 모두가 나처럼 자존심 상해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며 팀의 주장을 맡게 되었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축구부 학생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운동을 늦게 시작했지만 항상 열심히 하는 마음가짐 때문이었는지 축구 실력도 많이 늘었고 고등학교는 매년 우승을 하는 명문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학교 수업에 들어간 적이 거의 없다. 전국대회가 매달 있어서 학교를 장기간 빠졌고 대회 기간은 실력이 높은 만큼 길어졌다. 대회가 없을 때는 오전에만 수업을 받았다. 그마저도 땡땡이를 치고 PC방을 가거나 빈 교실에 가서 엎드려 잤다. 나도 몇 번은 수업을 따라가려고 노력을 해봤지만 수업 결손이 워낙 많다 보니 따라가는 것이 힘들었다. 결국에는 축구부 문화에 동화되며 공부도 열심히 하는 축구부 학생에서 운동만 하는 학생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어 갔다. 몇몇 선생님들은 축구부 아이들에게 교실에서 수업을 듣기보다 숙소에 가서 편하게 자고 축구만 열심히 하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며 특혜 아닌 특혜를 주셨다.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얼굴도 모를 정도로 학교 수업과는 멀어졌다. 고등학교 운동부 생활은 중학교 때보다 더욱 힘들었다. 1학년일 때는 어차피 저학년이라는 생각에 별다른 걱정이 없었지만 2학년이 돼서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컸다. 축구 실력이 뛰어난 후배들한테 밀릴 때는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축구부에서는 축구 실력이 그 사람의 지위고 권력이었다. 축구 실력이 뛰어나면 인정받았고 실력이 부족하면 무시당했다. 실력이 뒤쳐지던 나는 당연히 지위랄 게 없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축구부 회비와 대회출전비 등으로 힘들어하시던 부모님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우리 학교는 다른 학교에 비해 돈이 많이 들었다. 대회를 나가서 빨리 지고 돌아온다면 돈이 덜 들겠지만, 항상 마지막까지 남았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금전적인 부담이 컸다. 중학생 때는 몰랐던 부분이 고등학생이 되니 눈에 보였다. 아들에게는 보이지 않으려고 하셨겠지만, 금전적으로 힘들어하시던 부모님의 근심도 알게 되었다. 주말마다 집에 가면 항상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셨다. 한 주 동안 땡볕에서 힘들게 운동하느라 고생했다며 언제나 고기반찬을 차려주셨다. 어느 날은 나의 친누나가 울면서 엄마에게 따져 물었다. “왜 나만 있을 때는 반찬도 거의 없다가 동생 올 때만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거야!” 나는 운동하는 수년 동안 집에 가면 항상 맛있는 음식만 먹다 보니 당연히 집에서는 맛있는 음식,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때 누나의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이러한 나의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기대와 헌신 나를 위한 뒷바라지로 인해 상대적 소홀을 경험한 누나에 대한 미안함은 더욱더 나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운동을 시작할 때는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지만, 그만두는 것을 고민할 때는 그 나이의 학생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다. ‘내가 축구로 성공할 수 있을까?’, ‘주전선수로 뛰지 못하면 대학도 못 갈 텐데’라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그럼에도 가족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쉽게 운동을 그만둘 수 없었다. 내 삶의 모든 부분이 축구였고, 우리 가족도 다 축구에 맞혀져 있었기 때문에 축구를 그만두는 것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같았다. 일요일 밤 축구부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기도한 적도 있다. ‘내가 탄 버스가 사고가 나서 축구부 숙소에 못 갔으면 좋겠다. 불의의 사고로 운동을 그만두게 되면 좋겠다’라고 진심을 다해 빌어보았다.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정상적이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운동하며 만난 여러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마지못해 운동을 이어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운동을 그만두기 전에 나는 자신과 약속했다. ‘딱 세 달만 더 해보고 세 달 이후에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운동을 그만두리라!’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훈련에 임하니 실력이 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 나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이 부상을 회복하는 동안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다른 친구들의 실력을 따라잡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운동을 그만두었다.
운동을 그만두고 난 후의 생활은 모든게 새로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게 어려웠다. 항상 합숙소에만 있던 삶과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훨씬 편안하였지만 앞으로 내 삶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이 컸다. 나보다 먼저 축구를 그만두었던 선배들을 찾아가 여러 고민과 조언을 얻었다. 학교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도움을 받았다. 특히 도움이 되었던 내용은 지금까지 운동을 하면서 고생했던 스스로를 위해 2주 정도 휴식을 취하라는 말이었다. 다만 2주 정도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되뇌이며 새로운 삶을 준비하라는 의견도 포함되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을 지나면서 여러 부담감과 스트레스로 지쳐있던 나에게도 회복이 필요했었고, 2주간 휴식을 취하면서 진로전환 과정에서 생긴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전학을 간 첫날, 반 배정을 위해 학교 선생님께서 질문을 하셨다. “이현우 학생은 문과였나요? 이과였나요?” 나는 이러한 간단한 질문에도 답변을 못 할 정도로 학교와 멀어져 있었다. 새로운 학교에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지만 축구부 생활을 하다가 전학을 왔다고 하니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며 잘 챙겨주었다. 친구들과도 같이 축구를 하며 며칠 사이에 금방 친해졌다. 사실 전학을 오기 전에 부모님께 mp3플레이어를 사달라고 했었다. 친구가 아무도 없다 보니 쉬는 시간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한 걱정은 다행히 기우였을 정도로 금방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뒤쳐진 학업을 따라가기 위해 개인 과외를 하였다. 중학교 때 배운 내용들도 대부분 잊어버렸기 때문에 중학교 수준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우선순위 기초 영단어 책을 사서 학교에 들고 다니며 단어를 외웠다. 과외선생님은 기초 단어이기 때문에 하루에 50개씩 외우도록 숙제를 내주었다. 그 단어장을 들고 학교에서 외우고 있으니 몇몇 친구들이 그건 초등학교 때 배우는 단어 아니냐며 놀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나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모르는게 부끄러운게 아니라 모르는걸 숨기려고 하는 마음이 부끄럽다’라고 생각했다. 수학은 중학교 수준부터 다시 시작했다. 주말에는 하루에 300문제씩 풀도록 숙제를 내주셨다. 300문제를 다 풀려면 쉬지 않고 풀어도 족히 8시간은 넘게 걸렸다. 하루 종일 수학문제만 풀고 남는 시간에 영어단어도 외우는 것이 힘들 법도 했지만 운동할 때 힘들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편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땡볕에서 땀 흘리지 않아도 되고, 못했다고 맞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안하던 공부를 다시 하는게 힘들기도 했지만 위와 같은 생각과 내 인생을 위한 다짐을 계속해서 되뇌이며 극복해 나갔다. 학교에서도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몇몇 선생님들은 나를 보고 이런 초롱초롱한 눈빛은 교직 생활 이후로 처음 본다며 칭찬도 많이 받았다. 운동을 하면서 했던 노력의 크기보다는 적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칭찬을 받으니 더욱 힘이 나서 열심히 했다. 그렇게 운동을 그만두고 첫 시험인 2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보게 되었다. 평균 70점을 받자 선생님들께서는 축구했던 녀석이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았다며 놀라워하셨다. 친구들은 나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친구들에게 축구부 보다도 공부 못하는게 말이 되냐며 내 점수를 기준으로 놀리기 바빴다. 나도 점수가 오르기 시작하니 더욱 신이 났다. 고등학생이 된 후로는 공부를 아예 안해서 걱정했었는데 반에서 중간 정도의 점수를 받으니 자신감이 생겼다. 특히 담임선생님의 지도와 칭찬은 큰 힘이 되었다. 여기서 안주하지 말고 더 열심히 하라며 격려해 주셨다. 운동을 관두며 패배자라고 여겼던 마음이 점차 바뀌어감을 느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2학기 기말고사 때는 거의 90점에 가까운 평균점수를 받았다. 중간고사 때 내 점수보다 낮은 친구들을 놀리던 친구들도 나보다 낮은 점수를 받게 되었다. 좋은 점수를 받으니 그 누구보다 부모님께서 좋아하셨다. 운동을 그만두고 어긋나진 않을까 걱정하셨을 것이다. 운동을 할 때는 부모님이 이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본적이 거의 없었다. 항상 걱정하셨고 힘들게 운동하는 나를 안쓰러워하셨었다. 운동을 그만두며 들었던 죄송스러운 마음을 시험점수로 보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겨울 방학부터는 수능 공부를 시작하였다. 내신 공부보다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재미있었다. 하는 만큼 향상되는 것이 즐거웠다. 운동할 때 느꼈던 벽과 한계는 공부를 하면서는 느낄 수 없었다. 운동은 한계를 뛰어넘은 최상위 수준의 선수들만 성공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공부는 중간 정도만 해도 성공의 길이 열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3이 되어서는 항상 교탁 앞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책상에 ‘OO대 체육교육과 가자’라는 낙서를 적어놓고 공부를 했다. 몇몇 선생님들은 네가 어떻게 그 대학에 가냐며 핀잔을 주기도 하고 낙서를 당장 지우라고 했지만, 다음 시간에 다시 적으면 그만이었다. 그 당시 내가 가진 성적으로 OO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입학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고3 때 영어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합격할 거라고 믿어주셨다. 이러한 칭찬과 격려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축구했던 놈이 진짜 대단하다며 모르는 것을 알려 주고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OO대학교 체육교육과 실기가 근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종목(서킷트레이닝 방식-현재는 실기가 많이 달라졌음.)이라서 자신이 있었다. 부족한 공부가 우선이어서 입시실기는 최대한 늦게 준비하였다. 고3 10월부터 체대 입시학원에 다니며 실기준비를 하였다. 11월이 되어 수능시험을 봤다. 수능시험 성적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조금 아쉬웠지만, OO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지원할 정도의 성적은 되었다. 체대입시 실기도 목표했던 것보다는 조금 기록이 안 좋았지만 잘 마무리하였다. 대망의 대학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왔다. 만약에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다음엔 수능을 더 잘 볼 자신이 있었다. 노력하던 마음가짐이 통했던 것인지 나는 서울에 있는 OO대 체육교육과에 당당히 합격을 하였다. 그렇게 나는 체육교사라는 꿈에 다가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