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덧과의 사투, 전쟁을 겪는 도중.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성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는 16주가 되었다.
아들이건 딸이건 상관은 없으나, 사실 이왕이면 아들이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왜냐면 체력적으로는 힘들 수 있겠으나, 감정적으로는 덜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보통 딸들은 감정이 섬세해서 어렵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부모님과 잘 지내는 걸 지켜보니, 아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던 것 같다. 남편도 남동생이 있는 아들만 둘인 집인데, 다 커서도 부모님과 여행을 다닐 만큼 관계가 좋고 지금도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아무튼 의사 선생님께서 정확하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는 시간이 좀 흘러서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딸이라는 힌트 정도를 넌지시 주셨던 것 같다. 핑크색이나 핑크색 옷 그런 식으로 힌트를 주셨던 것 같은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내가 울기 시작하니 적잖이 당황하신 것 같았다. 요즘 딸을 선호하는 엄마들이 많다고 하는데 아마도 나의 눈물은 선생님의 예상 밖의 반응이지 않았을까.
왜 눈물이 났을까. 잘 모르겠다. 엄마랑 종종 싸우면서 들었던 "너도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는 말이 떠올라 두려워지기도 한 것 같다. 나는 타인에게 딱히 관심이 없고, 감정표현에 인색한 편인데 감정이 예민하고 섬세한 딸과 실랑이를 벌이는 상상을 하니 아찔했다.
약 1300일 간 딸을 키우면서 관찰해 본 결과 F와 T의 중간인 아빠와, 극 T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다행히 감정이 너무 섬세한 편은 아닌 것 같고, 아빠와 비슷한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아빠랑 쿵짝이 잘 맞는지, 둘이 정말 잘 논다.
같은 또래의 아들들을 볼 때면 다들 귀엽고 예쁘긴 하지만, 하루종일 뛰어다니고 지치지 않는 무한체력을 볼 때면 만약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보며 이 또한 감정케어 못지않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청난 체력을 자랑하는 아들들을 케어하는 아들맘들 정말 존경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무게여도 아들들이 더 무거운 느낌이다.)
성별을 떠나 하나의 생명을 독립적인 개체로 길러내는 건 정말로, 진짜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공감할 것 같다.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키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