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 스위스 제네바에 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2년간의 국제개발학 석사 공부를 잘 마치고 떠날 계획이었다. 석사 2학년 때, 새로 설립된 국제보건학 복수 석사 과정을 발견하게 되었고 두 번째 석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기존의 계획보다 1년이 연장되었다. 그리고 2019년 여름, 떠나려고 계획했던 제네바에 계속 남게 되었다. 국제기구 컨설턴트 오퍼를 받게 되어서. 그리고 지금은 이곳에서 현재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국제기구 계약직 컨설턴트로 일을 하다가 2020년 말에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면서 당분간은 제네바에 계속 살게 되었다.
수많은 국제기구 본부가 위치한 스위스 제네바. 누군가는 이곳에서 살아남기를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더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더 많이 성장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제네바에서 살아남기란, 나 자신의 기준을 잃지 않고 나에게 중요한 가치를 지키며,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제네바에서의 삶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좋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마트가 저녁 7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퇴근하자마자 빨리 장을 봐야 저녁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외식을 하기에는 비싸고 맛은 별로 없다. 쉬는 날에 즐길만한 것은 자연밖에 없다. 무엇보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갈 힘을 지켜내는 것이 쉽지 않은 곳이다. 주변에서는 제네바의 국제기구에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거나 해외에서 홀로 불안정한 삶을 이어나가며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도 많이 보게 된다. 학생들의 경우 미래가 불확실한 이곳에서 졸업을 맞이하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특히나 20-30대에 제네바에서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이곳은 여러모로 힘든 곳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나라 중 하나인 스위스. 간단한 외식 한 번 하려면 적어도 1인당 25프랑 이상은 생각을 해야 하고, 제대로 먹으려면 1인당 40프랑은 기본이다. 제네바의 생활비는 주택 임대료가 큰 몫을 하는데 학생들의 경우 기숙사를 정말 잘 구해야만 한 달에 600-900프랑 사이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일반 스튜디오 혹은 방 하나가 있는 집을 임대하면 월세가 1200-2400프랑 사이다. 시내에 위치한 집일수록 더 비싸고 가격이 저렴한 집일수록 더 구하기가 힘든 게 사실. 물론 국제기구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면, 집세 보조금 등 이런저런 혜택들을 누릴 수 있지만, 학생이나 인턴, 단기 계약직으로 거주하는 경우에는 이 모든 비용은 전부 자기가 부담해야 한다.
어쩌면 스위스는 잠깐 여행으로 혹은 교환학생으로 다녀가기에 좋은 곳인 것 같다. 기차를 타고 한두 시간만 가도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풍경들을 눈에 담을 수 있고. 비싸기는 하지만 스위스 답게 깨끗한 숙소에서 잠을 잘 수 있고, 맑은 공기와 좋은 물은 매일 공짜로 마실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오래도록 살기란 쉽지 않다. 스위스에서 학교를 졸업해도, 외국인 유학생이 학생 거주증 (Permit B)을 가지고 스위스 사기업에 취직을 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스위스 이민국에서 취업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왜 (1) 스위스인도 아닌 (2) 유럽연합 국가 국민도 아닌 (3) 제3 국적자인 나를 뽑아야 하는지 증명하는 과정까지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국제기구의 경우, 스위스 외교부에서 발급하는 거주증 (carte de légitimation, CDL)의 시스템이어서 스위스 거주증에 비해 발급 과정이 순조롭지만, 계약서의 연장 여부에 따라 스위스 거주 여부가 정해지기 때문에 이 또한 굉장히 불안정하다.
거주증도 한 가지 문제이지만, 살 집을 구하는 것도 문제다. 제네바에서는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직접 집을 보러 다녀야 하는데, 집을 보고 나면 취업을 하듯 지원을 해야 한다. 적게는 1:5 정도의 경쟁부터 1:100까지의 경쟁인 집들도 있다고 한다. 지원 서류 중에는 지난 3개월의 월급 명세서와 각종 연체가 없는지 확인하는 무혐의 증명서 (attestation de non-poursuite)를 제출해야 한다. 만약 스위스에서 안정적인 수입이 없다면 집을 구하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집세는 자신의 월급의 30%를 넘기면 안 된다는 스위스 정부 권장사항이 있다. 그래서 월세가 2000프랑의 집인 경우, 부동산에서는 적어도 월급이 6500프랑 이상인 지원자만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듯 어렵게 집을 구하고 나도 끝이 아니다. 대부분의 스위스 집은 공간만 대여하기 때문에, 집을 구하고 나면 안에 가구는 다 직접 사야 한다. 천장에 달아야 하는 전등부터 침대 그리고 기본적인 식기류 침구류 등을 다 따로 준비해야 한다. 보통은 이케아에서 많이들 주문을 해서 쓰다가 가는데, 이케아 가구들은 직접 조립을 하는 것도 일이다. 다만 제네바는 워낙 유동인구가 많다 보니 구입한 가구들을 제네바를 떠날 때 중고로 되팔거나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주고 갈 수 있다. 근데 이 모든 걸 몇 년이 아닌 몇 달 안에 다 겪어야 한다면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