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
고요하다. 하얀 시트 위로 고요는 밤새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창문 사이로 아침 해가 비치고, 먼지들이 반짝인다. 그녀는 눈을 떴다 감는다. 천천히 다시 뜬다. 옆을 본다. 어김없이 티켓이 놓여있다. 일어나 침대에 걸터 앉아 종이를 집어든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으로 '내일 봐'라고 쓰여있다. 반듯하고 정갈한 글씨는 따뜻하지만 의도적이다. 이인위적인 의도가 불편하다. 잠든 사이 사라져 있길 바랐는데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소한 대화를 기억해 받은 종이 한 장은 무거운 물질이 된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 손가락 사이로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넘긴다.
"왜 회색이 좋아?"
"흐리잖아 그렇게 번져서는 다른 색도 물들게 만들 것 같거든"
"그게 왜 좋은 건데?"
"보고 싶지 않은 걸 뭉개기 좋지 않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으니깐, 대신 부드럽게"
하얀 셔츠를 입은 그녀는 창가에 걸터앉아 말했다. 어딘가에 앉지도 서있지도 않는다.
명확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녀의 불편한 의도다.
전시회로 향한다. 해는 보이지 않는다. 회색빛이 짙게 구름 낀 하늘을 보며, 전시를 보러 가기 좋은 날이라 생각한다. 애당초 모든 그림을 다 볼 생각이 없다. 고민하는 듯한 턱을 괴고 있는 여자가 그려진 그 그림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회색빛으로 싸인 여자를 본다.
잊힌 여인(진정제)
지루하다고 하기보다 슬퍼요.
슬프다기보다
불행해요.
불행하기보다
병들었어요.
병들었다기보다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다기보다
나 홀로.
나 홀로라기보다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보다
죽어 있어요.
죽었다기보다
잊혔어요.
-마리로랑생
모든 게 잊히는 것에 대해 고개를 기울여 본다. 그림 속 여자의 표정에는 '모든 게 사라져. 결국엔 죽어. 전부 흔적조차 남지 않는 거야'라고 말한다. 두터운 붓에 되직한 회색물감을 텁텁하게 발라 글을 쓴다. 스스로를 종이 위에서 내쫓는다. 그래서 투명한 회색빛을 쓰는 방식을 알고 싶었다. 모든 색을 덮고, 뭉개고, 젖게 하는 색으로 종이 위에 남아있을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 애매한 짙음으로 가득 채우고 싶을 뿐이다.
'내일 봐'라고 했던 그 사람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회색에 덮여 버렸다는 소리는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