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라는 '패'를 잃어온 여자. 공백 메꾸기를 함께 하다
지금까지 실패(失敗)는 '패를 잃는다'로 알아왔다. 한자 검색을 해보니 아니었지만, 내 인지 속에서 실패는 '패를 잃는 것'이었다. 인생의 중요 단계에서 나는 건강이라는 패를 잃어왔다.
1986년 3월 초.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간호사셨던 엄마는 나이트 근무로 집에 안 계셨다. 언제부터 아침 등교를 스스로 해왔는지는 기억에 없다만 아마 그날도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집은 허름한 한옥집이었는데 안방에 있는 작은 개구멍 같은 곳을 통해 부엌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아니 출입처는 아니었을 거고 음식을 전달하는 용도의 작은 구멍이었을 거다. 하지만 몸집이 작은 나는 그 구멍을 통해 부엌을 드나들었다. 추운 겨울엔 안방을 나와 밖을 에둘러 부엌으로 가는 것이 귀찮았던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부엌으로 가려는데 그 날따라 발짓은 여느 때와 달랐는지 아니면 솥뚜껑이 제대로 닫혀 있지 않았었는지 나는 발을 잘못 디뎠다. 펄펄 끓는 솥뚜껑 안에 내 발이 들어간 것이다! 그 이후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남동생은 학교를 갔었는지도 모르겠다. 응급차를 타고 근처 S대 병원으로 갔다. 그 날 이후 대략 1년여를 나는 병원신세를 졌다. 3도 화상이었다.
화상 환자의 드레싱 치료가 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까진 피부에 살짝 물이 닿아도 따가울 판에 화상으로 약해진 피부를 소독하고 긁어내는 드레싱 치료는 고문에 가까웠다. 차라리 다리를 잘라달라고 몇 번을 소리 질렀던 것 같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듣기 힘들었던 엄마는 비상구 계단으로 달려 나갔는데 아무리 내려가도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고 나중에야 말해주었다. 시간이 흐른 후 생각해보니 엄마는 그때 고작 33세였다. 지금의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였는데 나이트 근무까지 하면서 아픈 아이를 돌보려니 너무 힘들었을 거다.
피부이식 수술이라는 걸 해야 했다. 허벅지에서 피부를 떼어 화상을 입은 발에 피부를 붙이는 큰 수술이었다. 전신마취는 4번 정도 한 거 같다. 수술보다 수술 이후가 고통스러웠다. 피부를 떼어낸 허벅지 부위에서 피가 계속 나와서 그걸 말려야 했다.
'피 말리는 아픔'이라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이런 표현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구나!
나는 고통스러워 미치겠는데 흰 가운을 입은 한 무리의 의사들은 내 앞에서 일종의 교육을 받는 거 같았다. 나의 고통에 대해 '고생이 많구나. 아프겠구나'라는 말 한마디 해준 의사는 없었다. 돌이켜 보면 대학병원이란 다 그런 것이지만 당시엔 의사들이 인간적이라기보다는 감정 없는 로봇 같았다. 수술 후 병문안 오는 교회 지인들도 싫었다. 엄마 지인들이었는데 나의 고통을 신이 준 시련으로 퇴원 후에는 간증을 하라는 것이 너무 싫었다.
가끔 친구들이 오는 건 좋았다. 학교에서 63 빌딩을 갔다고도 했다. 어떤 친구는 문제집을 주기도 했다. 내가 사고를 당한 날 아침엔 마침 반장선거가 있었다고 했다. 반장 후보로 내 이름이 올랐는데 선생님이 누군가한테 연락을 받은 후 내 이름을 칠판에서 지웠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칠판에서 지워지는 내 이름 석자 김 리 아. 그 장면을 상상하자니 괜히 슬펐다. 나이트 근무하며 바쁘고 피곤했을 엄마, 한량인 아빠. 딴에는 스스로 공부하며 4살 어린 남동생 케어하며 살아가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왔을까.
퇴원을 하고 집에 누워 있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피부는 아물었다고 해도 누워만 있다 보니 발목이 운동할 기회가 없었다. 발목이 90도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앉는 것은 가능하되 서서 발을 내딛는 것은 걸음마를 새로 배우듯 다시 시작해야 했다. 가끔은 피부가 간지러워 미칠 거 같았다.
누워 지내는 채로 6학년이 그냥 가버렸다. 3월 초에 다쳤으니 1년을 고스란히 날린 것이다. 중학교 입학 무렵 결정을 해야 했다. 6학년을 다시 시작하느냐 그대로 중학생이 되느냐. 고민 끝에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초등학교를 다시 다니다니 가오가 안 서잖아!
그런데 이게 웬걸. 중학생이 되니 도저히 수학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영어는 누구나 새로 시작하는 거라 어려움이 없었는데 수학은 역부족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과정에 파이(π)니 원주율이니 하는 것이 나왔었다. 즉 초등학교 6학년 수학은 산수에서 수학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과정에 커다란 구멍이 있었기에 중학교 수학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공부 욕심이 많았던 엄마는 나의 등수가 바닥이었어도 나무라지 않았다. 전신마취를 4번이나 한 데다 학교를 1년을 안 갔으니 성적이 안 나오는 건 당연하다 생각하신 거 같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 수학선생님이었던 담임 선생님이 그랬다.
"인문계 가려고? 인문계야 가겠지만 어차피 대학 못 갈 거 들러리만 되는 건데
인문계를 꼭 가야겠니?
그 선생님은 나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그 진심은 알고 있다. 당시 내가 공부 욕심이나 대학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닌데, 실업계를 가면 주산, 부기 등을 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되려 인문계보다 실업계가 내게는 더 어려워 보였다. 또한 묘한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 하고. 인문계를 진학했고 수학이 여전히 나의 발목을 잡았지만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괜찮은 대학에 입학했다. 서울대였다면 입지전적인 스토리가 되었겠지만 내 두뇌와 노오력이 그 정도는 아니었고. 중간중간 놀기도 잘 놀았다.
육체적인 고통이 얼마나 사람을 위축시키고 힘들게 하는지, 그로 인한 공백을 따라 잡기 위해서는 얼마나 시간과 노력이라는 자원이 잇따라야 하는지, 질병과 사고로 인한 고통과 공백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얼마나 메꾸기 힘든 구멍인지를 알았다. 또한 질병이나 사고는 본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신의 장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
30대에 또 한 번 경력에 공백이 생기는 일을 겪고 말았다. 어렵게 해외 취업에 성공했는데, 건강검진에서 결핵 진단을 받고 결핵약 부작용을 퍼레이드로 겪은 것이다. 약 설명서에 적힌 부작용을 두루두루 꼼꼼하게 다 겪었다. 도저히 회사를 더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10대에는 학업의 공백이었다면 30대에는 경력의 공백. 삶에 원망이 생겼고 말 그대로 전의상실이었다. 그즈음에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가 지병으로 인해 자살을 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사람들은 행복을 전도하는 사람이 자살이 웬 말이냐는 비난을 했지만 나는 오죽하면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끝을 알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은 사람의 인생을 갉아먹고 메꾸기 힘든 구멍을 준다. 그 구멍은 본인만의 노력에 더해 가족과 이웃의 지원이 함께 있어야 메꿀 수 있다.
오갈 데 없는 시기였다. 오직 글쓰기와 그리기만이 골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 인생의 실패기를 엮어 글이라도 쓰자 싶었고 그렇게 내 인생 첫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치료가 업인 남편과 인연이 되어 지금은 남편과 함께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내가 한의원에서 일하며 약을 달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 역시 신의 장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결핵약 부작용으로 다양한 통증을 소위 한 방에 두루 겪어 본 까닭에 나는 '동병상련'만렙의 한의원 상담실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의원에 내원하는 환자분들에게 감정이입을 많이 하는 편이고 남편과 봉사도 많이 했다. 어느 날 <동행>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현아를 알게 되었다. 화면에 보이는 현아는 심한 아토피 또는 화상을 입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현아는 <이영양성 수포성 표피박리증>이라는 읽기도 힘든 난치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태어날 때 상당 부분의 피부가 벗겨진 채로 태어났다고 한다. 나는 피부 화상만으로도 힘들었는데 지속적인 화상 상태라 할 수 있는 어린 현아의 삶이 상상이 안되었다. 드레싱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목욕이 가장 두려운 현아이다. 육아와 간병을 함께 해야 하는 젊은 현아 엄마의 모습에서 그 옛날 우리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현아 후원카페를 만들며 현아와 인연을 맺은 지도 9년이 되었다. 현아는 아직 어리지만 매우 성숙한 마음과 손재주를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아를 도와주는 만큼 현아도 도움 주는 사람이 되리라는 예감이 있다.
현아를 함께 후원했던 나의 친구가 작년 4월 하늘나라로 갔다. 그 친구를 응원하기 위해 현아가 동영상을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당시 말을 할 수 없던 친구의 눈이 살짝 커졌던 걸 나는 기억한다. 살다 보면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건강을 잃는 때가 온다. 그러한 때 건강만 잃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것이 함께 허물어진다. 그러한 공백을 메꿀 수 있는 건 주변의 도움이다. 아파봤던 사람은 공감력이 더욱 커진다. 그런 면에서 건강상의 실패는 다른 이들의 공백을 메꿔주는 귀한 경험적 자산이라 생각한다. 내가 어릴 적 겪었던 고통이 아픈 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픔은 공감의 밑거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