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아 Jul 23. 2020

말하지 않고 말타기

치매 걸린 운동신경의 소유자가 말을 탄다고?

오래간만에 말을 탔다. 제법 꾸준히 탔다가 여러 사정으로 승마장을 못 갔다. 1년여 넘게 말을 못 탔더니 그렇잖아도 치매 걸린 운동신경, 힘들게 배운 모든 것을 잊었다. 시간이 흘러도 몸은 기억한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건 아니다. 나의 운동신경은 둔할 뿐만이 아니라 기억력도 나쁘다. 


조카 뻘 되는 코치는 나더러 몸이 너무 뻣뻣하다고, 상체가 붕괴되었다며 허리를 곧게 세우란다. '상체 붕괴'라고 표현하니 내가 무슨 건축물이 된 거 같다. 허리와 등도 신경 써야지 발 뒤꿈치도 신경 써야지 고삐 잡은 주먹은 머그잔을 잡는 강도로 잡으라고 하지. 자세교정을 위해 온갖 비유가 등장하다 못해 급기야 내 발을 '앞발'이라 언급한 코치. 갑갑함이 반영된 무의식적 실수였을리라. 


"앞발을 등자에서 좀 빼세요!"


몸이 기억하고 있다면 아무리 1년여 만에 탄 말이라도 알아서 착착할 건데, 나도 어지간히 몸치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말을 타는 걸까?




언제부터 말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뚜렷하진 않지만 최소 20년 전부터 승마에 로망이 있었다. 아마도 몽골에서 말 타는 멋진 꼬마들을 본 후였던 거 같다. 몽골에는 '나담'이라는 축제가 있는데 말타기 활쏘기 씨름 등이 벌어진다. 사람과 말로 북적이는 초원에서 등자(발걸이)에 발도 닿지 않는 짧은 다리의 꼬마가 말 위에 앉아 나담을 구경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말과 사람 사이에 이뤄지는 '언어'가 너무 신기했다. 흔히 알려진 워~~~ (멈춰), 이랴!(그런데 승마장에서 '이랴!'라고 하는 걸 들어본 적은 없다) 등이 그것이다. 말을 탄다는 것은 액셀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고 브레이크를 밟아 멈추고,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 좌회전을 하는 등의 기계적인 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승마는 살아 숨 쉬는 말과의 교감이 이뤄져야 하며 온갖 종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동원되는 종합예술인 것이다. 말과 말이 통해야 말을 탈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말의 배를 툭 쳤더니 코치 왈, 그렇게 발로 차지 말고 종아리로 지그시 누르라는 것이다. 그 압박만으로도 충분히 간다고. 앞으로 나아갈 때 '쯧쯔쯔쯔...'라고 했더니 혀를 차는 것도 불필요하게 자주 하지 말란다. 다다다다 내뱉지 말고 쯔.. 쯔.. 하며 천천히 하라는 것이다. 말을 멈추게 할 때도 고삐를 너무 잡아당기지 말고 지긋이. 


모든 신호를 부드럽게 하란다. 신호를 크게 하는 건 말을 믿지 못해서란다. 마치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안 들릴까 봐 목소리를 키우는 것처럼 말이다. 강도 센 신호는 한국의 성질 급한 승마문화 탓도 있다며 말은 최소한의 신호로도 충분히 움직인다고 했다. 


"이렇게 살살해서 움직여요?"


"해보세요. 움직이잖아요. 충분해요."


"터치미(내가 탄 말의 이름)가 민감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래서 터치미인가?"


"아니에요. 그 정도 강도의 신호로도 말은 충분히 움직입니다. 그간 너무 과하고 불필요한 신호를 주셨어요."


정말 신기하게도 종아리로 말의 배를 살짝 눌렀을 뿐인데 앞으로 움직였고, 머그잔 쥐듯 가볍게 고삐를 살짝 뒤로 했는데 멈췄다. 어쩜 이렇게 통할까! 깡통로봇처럼 말 위에서 덜컹거리며 40여분을 말 위에 있었다. 말타기의 기본은 기술보다는 말과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자극을 최소한도로 해도 이뤄지는 액션의 바탕은 '교감'인 것이다. 말없이도 통화는 '염화미소'의 경지가 이뤄질 때 나는 힘차게 말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말과 혼연일체가 되어 자유롭게 말 탈 수 있는 날을 꿈 꾸며 승마 일기를 써보려고 한다. 


[오늘의 요약] 말에게 보내는 신호는 조용하게 - 말하지 않고 말타기 


어떻게 말 위에서 활도 쏠 수 있는 걸까? 대단한 경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