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여전히 이태원에 삽니다.
이태원에 산지 어언 28년이 되어간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집은 여기였으니 내가 살아 온 딱 그 시간만큼 나는 이태원에 살았다. 이태원이 고향이라, 두 단어가 함께 있는 건 내가 봐도 어색할 때가 있다. 어쨋든 내 고향은 이태원이고 여전히 나는 이태원에 산다.
이 글을 시작하게 된 건 이태원이라는 핫-플레이스에서의 삶을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서른을 맞이하기 전 이태원에서의 지난 삶을 한 번쯤은 정리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소소한 이태원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려주고 싶었다. TV에 나오는 핫-플레이스 이태원이 아닌 사람 사는 동네 이태원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앞으로 나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이태원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순서는 뒤죽박죽이겠지만 한편 한편 가볍게 읽어주길 바란다.
누구나 아는 이태원에서 언덕을 조금 오르고 골목을 좀 더 들어가다 보면 소음이 점차 멀어지며 어느새 화려한 이태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공간이 펼쳐진다. 내 이야기가 펼쳐질 주요 무대다. 이 공간 안에서의 내 삶은 '이태원 프리덤'과는 거리가 멀다. 이태원에서 사는 건 사실 그리 프리하지만은 않다. 고향이 이태원인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태원에 사는 사람으로서 지난 약 10여년간(성인이 되고부터) 어떠한 기대를 받아왔다. 매체에 소개 되는 이태원이 주로 화려해서인지 모두들 내 삶 또한 다이나믹 할 것이라 기대하는 듯 했다. 외국인 친구는 당연히 있고, 영어도 잘하고, 술도 잘 마시고, 클럽도 매일 가는 뭐 그런 삶..? 왠지 그렇게 살아왔어야 할 거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
하나하나 해명을 해보자면 이렇다.
1. 외국인 친구 - 외국인은 많은데 어릴 적엔 내 또래 외국인 만날 일이 없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 어른이 되서도 외국인 친구는 못사귀었다(사실 한국인 친구도 별로 없다..).
2. 영어 - 방금 말했듯 영어를 잘 하는 어른으로 자라지 못했다. 주변에 외국인이 많기는 했지만 한국사람이 더 많았다. 무엇보다 우리 엄마 아빠가 한국인이다. 그러니 그저 여느 한국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 딱 그 이유 때문에 영어는 잘 못한다.
3. 술 - 유전적으로 술 못한다. 그리고 이태원 술집 비싸다. 난 그리 부유하지 못하다.
4. 클럽 - 시끄러운 데 싫어해서 27살에야 처음 가봤다. 이제는 가고 싶어도 체력이 부족하다.... 저질..
이쯤 하면 앞으로 내가 써내려갈 이야기들이 기대와는 다를 거라는 게 조금은 감이 오지 않는가? 이태원스러운 무언가를 기대하고 들어왔던 사람에게는 사과의 말을 전한다. 내 삶은 그리 이태원스럽지가 않다. 실망스러울 수도 있으나 요즘 내가 이태원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종종 남산 산책을 하는 정도..? 충분히 이태원을 즐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태원에 살기위해 이태원스러운 것들을 모두 좋아할 필요는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태원은 오히려 내가 이태원에서 싫어하는 것들에 속한다. 누군가는 그런 화려한 이태원에 끌려 이태원에서의 삶을 선택하겠지만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태원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태원과 내가 좋아하는 이태원은 다른 모습일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태원은 조금은 소소하고 평범하다.
그러나 분명 이태원에서 사는 건 특별한 일이다. 그리 화려하지 못해도 이태원에서만 겪을 수 있는 흥미로운 일들이 내 일상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는 않길 바란다. 자유롭진 못해도 충분히 흥미로운 나름의 이태원스러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