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 정신과 약 봉투를 들킨다는 것

by Peace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지만 어떤 비밀은 필연적으로 발각된다. 나는 어린 시절에 쓴 일기장을 서랍에 넣어 잠그고는 그 열쇠를 잃어버릴 만큼 허술한 사람이다. 그런 탓에 그간 많은 비밀을 들키고 들킨 줄도 모르고 살아왔을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니던 당시 나는 고향 본가에서 통근을 하고 있었다. 집 근처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고 매번 2~3주분의 약을 처방받아 왔다.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은 고작 한두알이었지만 장기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약이 그렇듯 약봉투는 두껍고 존재감이 컸다. 약은 내 방 침대맡에 두고 하나씩 꺼내 먹었는데, 허술한 나는 약을 뒀다고 해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다니지는 않았다.

대학생이던 시절, 귀가하자마자 가방을 거실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는 습관 탓에 담배를 들킨 적이 있다. 그리고 딱 그 모양으로 아빠는 내 약봉투를 발견했다.


일터에 있던 얼빠진 내게 아빠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약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 했다. 아빠는 좋은 것은 나누고 당황스러운 것은 피하고 보는 보통의 중년 남성이었으므로 아빠 치고는 굉장히 구체적인 제안이었다. 그런데 아빠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든 마음은 안도감이었다. 아빠가 약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투에 조바심이나 실망같은 것이 묻어나지 않아서였다. 어쩌면, 컨디션이 잘 맞아떨어지기만하면 나의 상태가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얘기를 하려고 하니, 아빠와 약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약을 먹는 이유? 증상? 차도? 마음이 아파서 약을 먹는다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아빠가 딸의 정신과 약을 발견하고 무슨 생각을 할지가 아득해졌다. 이 문제는 예민하고 우리는 취약해진 채로 어떤 선을 지키며 살고 있었으므로, 약을 먹는 상황을 포장하고 순화해서 아빠를 설득해야 하는 지경이 되면, 그러면 아픈 마음이 더 아파지고 말 것 같았다.

정신과 약 복용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드러내야 했다. 같은 집 식구에게도 숨기며 몰래 앓던 고통을 꺼내 그 배경을 고해야 했다. 화자와 청자 모두가 괴로운 시간일 것이고 그 대화가 성공하리라는 계산이 서지 않았던 참이다.


그날 저녁 걱정하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자의 사적인 일정으로 시간을 내지 못한 탓이다. 목에 걸린 가시를 꾸역꾸역 넘겨 소화시키듯 우리는 회피에 성공했다. 모든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왜 물건 간수를 못해서 화근을 만들었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방 문을 벌컥 연 채 출근한다거나,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다닌 행동에는 ‘담배가, 정신과 약이 잘못은 아니지 않나?’ 하는 반항심이 있었다. 내 뾰족한 면이, 돌발행동이 가족에게 정면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좋았겠으나 그렇지는 못했다.

부모님이 내 방에서 숨겨둔 화장품 따위를 발견했을 때엔 격세지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깨의 타투를 발견했을 때에는 마음이 내려앉았을 것이나 그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약 봉투는 다르다. 화를 낼 수도, 따질 수도 없이 그저 많은 질문을 삼켰을 것이다.

서로가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저 아파서 먹는 약이라는 걸 이해할 용기와, 내가 그간 아팠던 이유를 설명할 용기.


이전 07화조용한 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