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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e Oct 21. 2024

조용한 사직

나라고 이러고 싶었겠어요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실제로 사직을 하지는 않으면서 최소한의 업무만 하겠다는 태도로 직장을 다니는 것. 워라밸이 중요해진 MZ세대 직원 사이에 유행하는 기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제로 사직을 하지 않으면서 소극적인 태도로 업무에 임한다는 점은 맞고, 워라밸이 중요한 MZ세대 직원이라서 그렇다는 점은 틀렸다.


유행하는 경제용어나 콘텐츠를 보면, 사람들이 MZ세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싶은지 짐작할 수 있다. MZ세대는 80년대 초반생부터 90년대생까지의 넓은 연령대를 아우르는 단어다. 예를 들면 81년생 과장과 95년생 주임. 그들이 함께 묶일 정도의 공통점이 있나? 81년생 과장님과 함께 일해본 95년생 주임으로서 정답은 '노'다. 게다가 젊은 직원들이라고 노는 것만 좋아할까. 이삼십 대 직원도 열정적으로 일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데다, 조용히 월급만 받아가는 나이 든 직원도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나는 바쁘게 살 때 안심하는 사람이다. 불안도가 높은 기질 탓이다. 학부 시절에는 동아리, 봉사단 등 교내 단체 활동을 학업과 병행해 왔고, 일을 시작한 이후에는 자격증 공부, 대학원 공부와 병행하고 있다. 그런데 직장인이 되고서는 매일 저녁 시간을 자기 계발에 쓸 수는 없는 것이, 때때로 야근하는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저녁 시간을 빼곡하게 채워 야근을 마친 뒤, 직장인 퇴근 무리가 한차례 쓸고 지나가 고요해진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 피로감과 성취감은 내가 기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런 내 업무 태도가 '조용한 사직'에 가까워진 것은 올해 중반기부터다. 군기 바짝 들어있던 수습기간을 지나, 입사한 지 1년 하고도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어쩐지 부서장이 내 업무에 '큰 관심이 없다'는 우연한 감각이 트리거가 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뿐 아니라 같은 업무 라인의 담당 직원 모두가 그런 참담한 기분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상했다. 우리는 업무를 문제없이 커버하고 있었고, 별다른 지시 없이도 기획안을 올려 업무를 추진해 냈다. 그래서였을까? 별다른 지시 없이도 무리 없이 일을 해서? 간단한 과업 한 건을 추진하기 위해 3개 업체의 견적과 작업기간을 비교한 문서를 만들어 보고한 날, '꼭 해야 하나?' 하는 심드렁한 피드백에서 절감했다. 아, 이거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이구나.


그렇게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만 일을 하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바쁘지 않은 시기라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출근 태그를 하고 자리에 앉아, 바쁘지 않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다른 짓을 한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퇴근 버튼을 누르고는 짐을 싸서 나온다. 이런 생활이 즐겁냐고? 상당한 자괴감에 질려가고 있다. 최악인 것은 이렇게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해도 부서장이 모른다는 것이다. 관심이 없으니까!


일을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다는 당연한 공식이 무너졌다. 열정과 소신으로 일하던 성실한 직원이 벌써 세 명째 퇴사했다. 가만히 앉아 시간을 때우다 요란한 접대로 상사를 홀려놓는 류의 직원만이 근속한다. 눈에 띄어 미움받고 싶지도 않고, 아무도 관심 없는 일을 요란하게 벌이고 싶지도 않은 나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졌다. 그냥 조용히, 필요한 만큼의 일을 하고 퇴근하는 것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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