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컷

4년분의 머리 자르기

by 김태은

최근에 나는 네 해 동안 기른 머리를 싹둑 잘랐다.


가슴과 배꼽 사이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 내 생애 가장 길었던 머리였다. 머리를 기른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에 치여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길어져 있었다. 머리를 기르는 건 마음먹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에게는 ‘방치의 결과’로 자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서서 문득 깨달았다. 내가 생각보다 훨씬 긴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머리카락이 내 어깨를 넘어가고, 등을 타고 내려가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묵직하게 따라오는 걸 보면서, 마치 누군가의 머리를 대신 달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


그 순간, 오래 잊고 지냈던 십 대 시절의 마음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늘 단발이나 어깨까지 오는 머리만 반복했다. 소위 ‘거지존’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한편, 머리를 길게 기르고 똥머리를 만드는 친구들은 괜히 부러웠다. 아무렇지 않은 듯 동글동글 말아 올리면 이마 위로 삐죽 솟아나는 작은 동그라미. 한 번쯤은 나도 그렇게 머리를 묶어보고 싶었다. 아주 사소한 동경이었다.


그 동경은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잊혔지만, 나는 이미 그 시절의 소망을 이룰 만큼 충분히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 잠깐 신이 났다. 늦게 도착한 기회를 다시 받은 사람처럼.


올림머리도 해보고, 반묶음도 해보고, 땋아도 보고, 집게핀도 꽂아봤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몇 번이고 다시 고쳐 묶고, “이런 느낌이었구나” 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쯤 그렇게 머리를 바꾸며 보내고 나니, 십 대의 동경은 놀랄 만큼 담담하게 충족되어 있었다. 꿈은 대단한 사건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조용히 ‘해봤다’는 감각 하나로 끝나기도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대신 불편함이 또렷해졌다. 긴 머리는 늘 시간이 따라붙었다. 머리를 말리는 시간이 정말 길었고, 머리카락이 한두 가닥이 아니라, 어느새 수십 가닥씩 바닥에 떨어져 작은 뭉치를 이루는 날이 잦아졌다. 무엇보다 머리를 말리는 시간마다 아이는 다가와 “엄마, 이제 놀자” 하고 말했다. 아직 머리가 축축한데도.


매일 같은 말을 듣다 보니 아주 가볍게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 그냥 잘라야겠다.


그 생각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그대로 미용실에 갔다. 머리만 말리면 될 것 같은 숏컷 이미지를 찾아서. 미용사는 내가 보여준 사진을 보고 “이건 드라이한 머리예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내게 중요한 건 ‘사진처럼 되는가’가 아니라 ‘내가 편해지는가’였기에.


거울 속에서 머리카락이 점점 짧아지는 동안 잠깐의 아쉬움이 스쳤지만, 이미 늦었다는 감각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게, 때로는 가장 좋은 안정감이 된다.






나는 삶에서 종종 이런 식으로 결정을 내린다. 홀로 오래 각하다가 어느 날 말로 꺼낸다. 고민의 과정을 나누지 않아서, 내 결론은 늘 단정한 문장으로 밖에 나온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럽게 보인다.


“이렇게 빨리?”
“조금 더 고민해보지 그랬어.”

너무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 아니야?”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예전의 나는 흔들렸다. 정말 내가 충동적인 사람일까, 이 결정이 치기 어린 선택은 아닐까 하고. 충분히 생각했다고 믿으면서도, 혹시 너무 쉽게 결론에 닿은 건 아닐지 혼자서 여러 번 되묻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내린 결정들은 대부분 오래전부터 머릿속에서 여러 번 오르내린 끝에 나온 것들이라는 걸. 다만 그 과정을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도.


나를 만류하던 말들 역시, 언제나 나를 위한 조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대로 있으면 그들의 익숙한 자리도 유지되지만, 내가 움직이면 그들 역시 방향을 바꿔야 한다. 만류는 때때로 사랑이지만, 동시에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참고 버티며 나 자신을 조금씩 소모시키던 시간보다 결정을 내리고 나서의 시간이 더 나았다. 이미 잘라낸 머리처럼, 이미 꺼내놓은 말처럼, 대부분의 선택은 시간이 지나며 내 삶의 리듬 안으로 스며들었다. 조금은 아쉽고, 조금은 불안하지만 결국에는 제자리를 찾았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예전보다 차분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본다. 충분히 생각한 뒤 조용히 결론에 닿고, 그 선택과 함께 살아가는 나를. 조금 빠르게 결정하고, 조금 천천히 받아들이며 그렇게 나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언젠가 또 누군가가 말하겠지. “왜 그렇게 갑자기?” 그때의 나는 아마 예전보다 덜 설명하고, 더 담담하게 웃을 것 같다. “갑자기는 아니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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