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록

by 이유진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 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대로 소식을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다시 읽어봤다. 또 한 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기행_김승옥





클렌징 폼을 사려면 책을 한 권 사야 했다. 보관함에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몇 권의 책들 중에서 나는 무진기행을 골랐다. 비가 정말 많이 내리는 어제, 어두운 방에 불을 켜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후 93.1을 틀어놓고 이 책을 읽었다. 이런 편안함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내 안의 조급함이 잠시 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덮고, 무진의 안개를 그려 보았다. 몇 년 전 보성에서 내가 보았던 새벽안개와 흡사할 것 같았다. 내 고단함은 안갯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이 무엇 때문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보이지도 않는 무엇이었다면 그 보이지도 않는 무엇을 향한 기대와 바람은 아예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보일 듯 말 듯한 그것이 내게 거짓 희망을 말하고, 헛된 꿈을 키우고, 끊임없이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에게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그것을 계속 갈망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것 같았다. 슬펐지만 울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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