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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Mar 21. 2023

우아한 가난의 시대

우아한 가난의 시대 : 김지선 에세이 / 김지선

서울 : 언유주얼, 2020


개인적인 바람을 하나 덧붙인다면,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충분한 우리의 사치에 '탕진잼'이나 '시발비용'보다는 좀 더 우아한 언어가 따라붙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인터뷰로 만났던 문정희 시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모두가 메신저 언어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까 축약된 말과 과격한 말들이 넘쳐나죠. 하지만 시의 언어를 읽고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우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한 것 같아요. 인간은 언어로써 존재하는 거잖아요. 물 한 잔도 고급 브랜드의 생수를 마시는 사람들이, 흙탕물 언어를 쓴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에요."  p.22


이제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소비자들이 태어나고 있다. 이 소비자들은 수십 년간 갚아야 하는 대출에 발을 들이기를 원하지 않으며, 부모들이 살았던 전통적인 커다란 집에 살기를 거부한다. 사치는 좋지만, 좀 더 작은 규모가 좋다고 그들은 말한다. 타이니 하우스의 주인 들은 자긍심이 넘친다. 그리고 그들이 옳다. 한때 나는 이것이 과도기적인 혼란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삶은 완성될 것이며, 하나의 생활양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만들어지리라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자체가 완성된 삶임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끌어안은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잡다한 공간이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집은 그 자체로 그곳에 사는 사람에 대해 말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집은 궁핍하면서도 사치스럽고, 허영덩어리인 데다가, 여전히 무언가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 사람은 무너지기 직전의 행거 아래 누워서 빵빵한 스피거로 음악을 들으며 아주 만족해하고 있다. p.33


우리 세대의 미래는 블러 처리한 사진과 같다. 지금 내 주위에 자기 삶의 미래 형태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장 십 년 후에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앞으로 남은 몇십 년의 삶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 거다. 일할 기회는 사라지고, 일해야 하는 의무만 여전히 남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제 가능한 일은 미래에 대한 망각뿐인 듯하다. 어쩌면 우리의 사치는 앞이 조망되지 않는 내리막 세상에서 터득한 날카로운 생존 감각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러한 삶의 방식은 누군가가 비웃거나 설교할 만한 것이 아니다. 오르막 세상에서 내리막 세상으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변화인 것이다. 가난과 우아한 삶은 과연 공존할 수 있을까? 위기의 상황에서 적은 돈으로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해 온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고, 우리는 이들의 팁을 전수받을 필요가 있다.  p.88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계층을 이루고, 똑같은 권리를 누리고, 누구나 노동을 하며  죽는 날까지 보살핌을 받죠. 돈, 빛, 건강, 은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요. 수녀들은 누가 가장 수입이 많은지, 누가 가장 이름나는 일을 하는지, 누가 가장 똑똑하거나 날씬하거나 매력적인지 상관하지 않아요. 가장 부유하게 죽는 사람을 승자로 보지 않고, 경쟁하고 이기는 데 몰두하는 세상사에서 멀찌감치 멀어져 있죠. 결혼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고요."
수녀원에서의 삶은 확실히 가난하지만 우아한 삶을 원하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바가 있다. 검소하지만 품위 있다. 함께인 동시에 혼자이며, 예상보다 자유롭다. 우리를 풍요롭게 해 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p.96


그러니까 명상의 필요충분조건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심리적 시간인 것이다. 일과 연애, 가정사 등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무수히 많은 책무 사이에 숨 쉴 수 있는 한 뼘 크기의 시공간을 마련해 둔 사람들의 모습은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우아해 보였다. 명상은 현대 사회에 이르러 최고의 사치품이 되었다.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마음챙김) 산업은 놀랄 만한 규모로 성장하고 있고, 대도시 호텔과 스파들은 개인용 명상 기기를 구비해 놓는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등의 글로벌 IT 기업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내 프로그램은 명상이고, 돈을 갈퀴로 끌어모으는 실리콘 밸리의 부자들은 각종 인터뷰에서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30분 동안 명상을 하고 출근한다고 말한다. 뉴욕타임스는 '왜 실리콘밸리는 고통의 미덕에 집착하는가"라는 기사를 통해 스토아 철학에서 비롯된 '스토이시즘(Stoicism)', 즉 금욕주의가 실리콘 밸리에서 유행한다고 말했다. 매일 아침 5마일을 걸어 출근하고, 열흘간의 휴가 동안 묵언수행을 하고, 찬물 목욕을 하고, 매일 한 끼만 먹는 '1일 1식'을 하고, 겉옷을 입지 않은 채 빗속을 걷고, 눈 덮인 길을 맨발로 걷는 고통을 거처하고 있는 그들에게 좀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다.  나의 선배는 어느 날 갑자기 '고양이가 제격이다'라는 엉뚱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무슨 말인가 하니, 머리가 복잡해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길 고양이들이 잘 나타나는 동네 어디쯤에 간다는 이야기였다. 고양이들이 나타나면 밥을 주고, 그들을 쫓아다니다 보면 산책완료. 그는 이 시간을 사랑한다. 나 역시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당연한 권리라고는 듯 나의 배 위에 올라앉아 있는 우리 집 고양이를 보면서 무아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p.136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들이 북적대는 술집 같은 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회다. 외계인 급으로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이상적인 모듈을 정해 버리면 나머진 다 비정상이 되어 버린다. 그럼 불행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의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들은 타인과의 비교에 얽매여 있는 사회일수록 불행하다고 이야기한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가 되면 목소리가 크지 않은 약자들도 행복해질 있는 기회가 확률적으로 많아진다."

우리는 한동안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처럼 말하지 못했다. 완곡하게 돌려서 하는 거절이 미덕이고, 재밌지 않아도 적당히 웃어 주는 것이 사회적 약속이며, 싫다는 감정보다는 좋다는 감정을 앞세우는 것이 유리한 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일은 살아가면서 지키고 싶은 것과 피하고 싶은 것, 나아가 확신을 가지고 거부해야 할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다. p.173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노력해야 한다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아 왔다. 내신 성적이 중요한 학창 시절과 무슨 일이든 해서 이력서의 빈칸을 채워야 하는 취업 준비생 시절을 거쳐 일 잘하는 직장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거치다 보면 자연스레 잔잔한 신경증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매사에 여유가 없는 사람은 매력이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노력 대신 매력을 선택했다가는 무서운 곳으로 떨어질 것 같다. 이런 공푸가 삶의 모든 시기에 드리워져 있다 보니 어느 시점이 되면 모든 일에 초조하고 안달복달하면서도 어떤 일도 깔끔히 마무리하지 못하는 상태와 맞닥뜨린다. 무기력하고 나태하며 게을러 보이는 생활습관들은 번아웃 증상의 일부일 수 있는 것이다. p.205


[우아한 가난의 시대]를 증명하는 이들은 나의 전철을 밟지 않고 가난을 "다루는" 방식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오랫동안 가난은 극복의 대상이었고 그렇지 못한 자는 자책하며 살아야 했다. 큰 목표를 위해 돌진하는 것은 일종의 도덕이었고 이를 위해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필요한 작은 요소들은 거세해야 마땅했다. 내 아버지가 가진 철학이었고 나 역시 이를 삶의 지혜인 양 여겼다. 어른들은 내게 "젊을 때는 다 없이 시작하는 거다"는 말을 자주 했고 이와 비례하여 나는 "없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기억하며 자연스레 실천했다. 하지만 가난해도 우아하겠다는 이들은 힘들게 시작해서 계속 힘들게 사는 "나 같은 선배들을 보며 고전적인 동기 부여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들은 처음이 미약하면 끝은 결코 창대해지지 않는다는 현실에서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다짐을 이전 세대들과 다른 방식으로 실천한다. 극복, 절제 등의 숨 막히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왕 가난한 인생이니, 지속될 가난에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한 우아함을 찾는다.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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