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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Apr 14. 2023

작별인사

작별인사 / 김영하

서울 : 복복서가, 2022





아빠와의 홈스쿨링이 나빴던 건 아니다. 그는 좋은 선생이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라는 곳에 가고 싶었다. '홈스쿨링'이라는 말부터가 '스쿨'을 전제로 한 말 아닌가. 그는 나에게 고전소설도 많이 읽혔는데, 내 나이 또래의 청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은 하나같이 학교를 주된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물론 주인공들은 학교에서 왕따도 당하고, 얻어맞기도 하며, 집단생활에서 스트레스를 겪기도 한다. 그래도 거기에는 친구라는 존재가 있었다.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돕는 친구들, 그는 가끔 나를 연구소 가족 동반 모임에 데려갔고, 그럴 때면 다른 연구원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뻘쭘하게 앉아 자기소개를 하고, 별 재미없는 보드게임을 하면서 어른들의 시간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이상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021


밤이면 종종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그 빈도가 잦아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비행물체가 초음속으로 공중을 돌파하는 소음이 건물을 흔들기도 했다. 그런 소리들에 시달리며 나는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밤이면 멀리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듯한 환청에 시달렸다. 그것은 내가 잘 아는 누군가의 목소리 같기도 했지만 명확하지 않았고, 때로는 악몽의 잔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둔중하게 들려오는 희미한 폭발음과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 폭발음은 귀를 막으면 들리지 않았지만 나를 부르는 음성은 귀를 막으면 더 크게 들렸다. 이렇게 서서히 미쳐가는 게 아닌가 두려워하면서 나는 조금씩 환경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070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정이라고 하던데?"

"그럴 리가 전혀 없는 게, 내가 만약 자기가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휴머노이드라면, 물론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럴 가능성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이제는 그럴 가능성도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끔 생각하기는 하는데, 하여간 만약 그렇다면, 설명이 안 되는 게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아빠가 그걸 나한테 숨길 이유가 없어." 083


"걱정하지 마, 누나가 고쳐줄 거야. 넌 내가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인간보다도 훌륭하고, 그 어떤 인간보다도 온전해.. 우리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어. 민이 네가 인간이든 기계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수억 년간 잠들어 있던 우주의 먼지가 어쩌다 잠시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해 의식을 얻게 되었고, 이 우주와 자신의 기원을 의식하게 된 거야.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잠깐을 이렇게 허투루 보낼 수는 없어. 민아. 너는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다 보고 느끼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099


"당신의 믿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잘 알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인간들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비합리적인 어떤 일을 벌이면서 늘 과학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개념들을 갖다 붙입니다. 말이 안 될수록 더 잘 믿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 여기서 하나만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이 휴머노이드를 다시 살리는 걸 원하는 것은 선이 당신이고, 당신은 앞으로 이 아이가 겪을 전적으로 불필요한 고통에 유일무이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저와 제 동료들은 이 휴머노이드의 핵심적 기억과 의식을 복원할 것입니다. 물론 백 퍼센트 다 되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몸을 찾아 거기에 이 기억과 의식을 이식할 것입니다. 얼굴과 몸은 당신이 알던 그 아이와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164


"어디 인간 같지도 않은 게 감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거야. 고통 없이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아? 휴머노이드는 저렇게 실려가면 간단하게 기억을 지운 후에 해체하고 부품을 재활용해. 그런데 나를 봐.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죽음은 쉽게 오지도 않고, 고통은 끝도 없어. 인간에게는 인권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게 있어서 그냥 죽어지지가 않아. 걔들이 뭐가 불쌍해? 나, 나 , 인간으로 태어나 늙어가는 내가 제일 불쌍하다고, 저 기계들이나 개새끼들이 아니라." 194


일종의 순수한 의식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나는 짐작하지 못했다. 몸만 없을 뿐, 별 차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 없이 정신만 있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경험이었다. 마치 잠깐 동안 하겠다고 시작한 명상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명상을 끝내고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싶지만 몸이 없기 때문에 다시 생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241


인공지능이 인간적 요소들을 흡수하는 반면, 나는 오히려 최박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나의 의식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 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 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276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뭘 한단 말인가. 나의 의식은 인간과 소통하며 지내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없다. 옆에서 나를 핥으며 낑낑대는 개들 말고는.. 내가 없더라도 개들은 이 풍요로운 들판에서 잘 살아갈 것이다. 달마는 개별적인 의식은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했고, 선이는 어차피 우리는 모두 우주정신으로 돌아갈 것이니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이야기를 완성하라고 했다 쇄골의 버튼을 누르면 구조는 되겠지만 내 개별적 자아는 지워지고, 내 의식과 경험, 프로그램도 인공지능에 흡수 돼버릴 것이다. 296


석양이 기세를 잃고 이제 검고 어두운 기운이 하늘 한가운데서부터 점점 넓게 번져가며 거칠고 누른 땅을 덮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끈질기게 붙어 있던 나의 의식이 드디어 나를 떠나간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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