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사는 숫자를 소재로 일하고
사서는 책을 소재로 일한다.
숫자는 손에 잡히지 않고 실체가 없으며 추상적이다. 종이 위에 찍혀 있을 뿐이고 결과물도 간결한 숫자(회계장부, 세액 등)로 나타난다. 회계 사무실에서 4년간 일했던 내가 사서가 되고 가장 기쁜 점은 추상적 세계에서 실체가 있는 세계로 넘어온 일이다. 해녀가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캐듯, 약초꾼이 숲에서 약초를 캐듯, 사서는 지식의 바다, 지식의 숲에서 좋은 책을 캔다. 캐낸 책은 추천도서, 테마도서로 전시되고 책꾸러미 속에 담겨 책 이용자에게 정신적 자양분이 되어 간다. 이 중에서도 책꾸러미로 공급된 책은 관련 만들기 활동과 감상평 등 피드백과 함께 돌아온다. 내가 최고로 꼽는 피드백은 책꾸러미 사업에 참여 중인 어느 학부모의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감상평이었다.
이 책을 이제야 읽어 안타깝지만, 이제라도 읽어 너무 다행스럽게 여기며,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에 과학적 사고가 추가됐다.
이 감상평은 내가 좋은 책을 만날 때마다 느꼈던 감탄, 기쁨과 정확히 일치했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책은 내게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신선한 프레임을 제시하는 책이다) 한때 유행했던 말처럼 “야, 너두?”라며 감상평을 받아들고 내면의 환호를 질렀다. 이게 바로 책을 소재로 일하는 기쁨, 사서로 사는 기쁨이다. 도서관 휴관일에 출근해 불 꺼진 서가에 가보면 형광등이 환한 다른 날과 다르게 숲에 햇살이 쏟아지듯 조용하고 한가로우며 따듯한 느낌이 난다. 그 사이를 거닐며 좋은 책을 찾아 이리저리 뒤지고 다니는 일은 서류 더미에 묻혀 이 법과 저 법, 이 숫자와 저 숫자를 헤매는 일보다 분명 큰 기쁨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