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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Jul 22. 2022

핑크빛 숲에서 펼쳐지는
모험과 성장 이야기

베르메유의 숲(까미유 주르디/바둑이 하우스, 2020)

도피처가 필요할 때가 있다. 상황을 내 힘으로 바꿀 수 없을 뿐 아니라 내 편이 아무도 없다고 느꼈을 때. 현장을 무작정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본다. 학교 밖을 벗어날 수 없을 때 간혹 학교도서관을 그런 장소로 찾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곳을 찾아 들어가거나 사람이 없는 서가 사이를 하릴없이 배회하곤 한다. 잠시 후, 누군가 찾아와 조심스럽게 묻는다.

"선생님, 혹시 00이 도서실에 안 왔어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고 내 마음 읽어주는 이 아무도 없다고 느꼈을 때 문득 가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매일 같은 밥을 먹고사는 데다 사람 사이의 거리가 유독 가까운 가족 관계는 서로 생채기를 내기 쉽다. 부모의 이혼과 재혼, 새로운 가족 구성이라는 낯선 환경에 놓인 '조', 새엄마와 두 언니가 낯설기만 하다. 그런데 아빠조차 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오히려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조가 못마땅하다. 아마 반강제로 따라나서야 했던 가족 캠핑에서 결국 조는 식구들을 떠나 숲을 향한다. <베르메유의 숲>이다.


베르메유는 숲 속에 사는 조랑말이다. 빨강, 파랑, 분홍, 점무늬, 무지개 색깔 등 다양하다. 신기한 것은 누군가에 의해 자유를 잃었을 때 자기 색깔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숲에는 요상한 생명체들이 많이 산다. 손바닥만큼 작은 요정 부부, 고양이 귀를 한 누크와 엄마, 눈이 하나뿐인 사람, 긴 꼬리를 달고 있는 사람, 고양이 독재자 마투황제, 이에 맞서는 용감한 여우 청년 모리스 등. 메르베유는 프랑스어로 '경이롭고 경탄할 만한, 또는 불가사의한 초자연적인' 무엇을 뜻한다. 뒤바뀐 글자만큼이나 베르메유의 숲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이 세상은 야릇하고 신비롭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톱 긴 고양이 독재자 마투 황제는 자기 뜻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누크 엄마와 마을에 사는 이들을 가두었다. 황제성에 갇힌 베르메유들은 이미 고유의 빛을 잃었다. 귀족들은 잔치를 벌이고 하인들은 꼼짝 못한다. 마을에 남은 이들은 가면무도회가 벌어지는 황제 생일날 위장을 하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구출하기로 한다. 엄마를 구하겠다고 수레에 몰래 숨어 들어간 누크를 따라 조는 얼떨결에 동행한다. 결국 무리들은 경비병에게 발각되어 감옥에 갇히고 만다. 조와 여우 청년 모리스만 가까스로 탈출한다. 이들은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구출하고 자유를 찾게 될 것인가, 이야기의 앞부분이다.  


그래픽 노블인 <베르메유의 숲>은 보는 재미가 있다. 간결한 선으로 무심히 쓱쓱 그린 듯한 귀여운 그림체,  갇히지 않은 말풍선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연하고 부드러운 수채화 파스텔톤의 색체가 맑고 밝다. 독재자에 맞선 투쟁, 이혼과 사랑, 갈등과 평화, 모험과 성장을 다루고 있으나 심각하지 않다. 간간이 위트 섞인 등장인물의 멘트가 웃음 짓게 한다. 예를 들어 다음은 조가 맨 처음 손바닥만큼 작은 부부 요정을 만나 따라가면서 베르메유 숲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다.


조 : 우와!! 너희 꼬마 요정들이지?

작은 요정 부인 : 왜 우리를 항상 꼬마 요정 따위로 부르는 건지.

조 : 나는 너희들이 존재할 줄 알았어!

작은 요정 부인 : 어휴, 하지만 우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라.

작은 요정 남편 : 그래, 참견 말고 저리 가렴.

조 : 나처럼 어린 소녀가 혼자 숲에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작은 요정 부인 : (남편에게) 쟤한테 대답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계속 우리 옆에 있을걸.

조 : 음, 나는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데, 오두막을 지으려고. 그게 내 집이 될 거야.

작은 요정 남편 : 멋지네!

작은 요정 부인 : (남편에게) 야 내가 뭐라고 했어!

조 : 나는 매우 늦게 잘 거고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을 거야.

작은 요정 남편 : 학교? 그게 뭔데?

작은 요정 부인 : (남편에게)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당신이랑 이혼이야!

                                                                                                                           (본문 4쪽) 


이후에도 요정 부부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어김없이 이혼 얘기가 나온다. 부인이 툭하면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 때문이다. 이에 무심한 남편의 반응도 재밌다. 이야기 속에서 감칠맛 나는 양념처럼 느껴진다. 

   

칡흙 같은 숲 속 늪지대에서 이빨투성이 괴물을 만나고, 아차 하면 자신을 잃어버리는 망각의 평원을 지나 개성 강한 세 할머니들이 사는 '할망구들의 막집'에서 수수께끼 같은 대화를 나누며 조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어... 저희 부모님도 이혼하셨고요. 심지어 아빠는 지금 새엄마랑 있어요."

"음... 그래서? 그게 큰 일인 거니?"

"너는 무엇을 원하는 건데? 두 분이 순전히 너를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 같이 있는 거?"


막집에 사는 할머니들과 나누는 대화는 유쾌하고 즐겁다. 문제를 깃털처럼 가볍게 만든다. 조의 감정까지 어루만지면서. '사랑은 형편없는 것'이라며 결혼 같은 건 절대 안 하겠다던 조가 베르메유 숲을 스스로 나설 때 무엇을 깨달았을까. 삶은 누군가와 끊임없이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 이별 뒤엔 언제든 사랑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을까. 어쨌거나 조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인다.  


한 컷 한 컷 그림과 함께 흥얼거리는 누크 엄마의 노래 가사는 잔잔한 여운과 감동을 남긴다. 아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베르메유 숲 못지않은 신비롭고 모험 가득한 세상은 아닌지.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다면 핑크빛 베르메유 숲으로 떠나 보는 것도 좋겠다.


노여움은 가라앉고 

아이는 성장하는 이야기

저녁나절 푸른빛은 숲을 뒤덮고

이제는 늑대들의 시간, 도깨비불 춤추는 시간

집에 가야 할 시간, 다시 만날 시간..

내일 또 놀 수 있으니..

구슬놀이, 카드놀이, 인형놀이

카우보이도 되고, 악동도 되고, 골목대장도 할 거랍니다.


이렇게 삶은 흐르는 거겠지요.


언젠가 모험, 꿈,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소풍을 훌쩍 떠나고 싶다면

그 핑크빛 숲으로 살그머니 들어가 보아요.

찬란한 베르메유들이 뛰노는 숲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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