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사서 유 May 05. 2019

[D+43] Sydney Vivid Festival

노동자에서 여행자로

홀로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 가이드 없는 패키지여행과도 다름없었던 나는 엑셀로 정성스레 만든 일정표를 집어던진 후 가보고 싶은 여행지 몇 곳을 추리고나서야 비로소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평소 듣던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듯 여행을 하는 그 기분. 나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때가 종종 그리웠고, 유럽이 어땠는지를 묻는 지인들에게 한 번 즈음은 꼭 그곳의 생활자처럼 여행하라는 말을 하곤 하였다.


시드니에서의 삶은 여행자와 노동자의 모호한 경계 그 어디쯤이었다. 매일같이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는, 한국에서의 직장생활과 크게 다를 바 없던 비슷한 날들의 연속. 그나마 향수병에 시달리지 않았던 이유는 같이 지내는 좋은 사람들과 여전히 낯설고 새로운 일 때문이었다. 키친 핸드로 일하는 나는 여전히 오픈이 늦었고(심지어 매일 같이 10분 일찍 일을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주문이 몰려올 때마다 긴장하여 잔실수를 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일한 지 한 달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칼질이 서툴달까. 사실 익숙하지 않은 주방일은 나에게 매번 벅찬 과제와도 같았다.


게다가 짧은 노동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밤은 금세 찾아와 잠들기 전까지 남은 나의 여가시간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집에서 고대로 누워서 몇 시간을 잠들기 일쑤요, 하루 종일 핸드폰을 붙들고 하우스메이트들과 수다를 떨고 나면 금세 밤이 찾아오는 형국이랄까. 그렇게 퇴근 후 남은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는 잘 쉬었다는 생각보다도 이대로는 안될 것 같다는 일종의 '휴식 강박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런 휴식 강박증에서 벗어나고자 내가 새운 대책은 가급적이면 퇴근 후 약속을 잡아 시내로 나가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키친 핸드와는 어울리지 않은 구두와 코트를 바리바리 싸 들고 출근한 나는, 튀김 냄새가 나는 유니폼을 벗어버리고 서큘러퀘이로 향했다. 유럽에서 몇몇 장소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애틋해지는 마음의 휴양지와도 같듯이 이곳 시드니에서도 그러한 곳들이 내게는 몇 군데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세계 3대 미항으로 불리는 서큘러퀘이였다. 시도해보지 않았던 오페라 하우스 정문까지 다다라 밑에서 야경을 내려다보자, 세상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그림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불빛들은 멀리서 보니 작은 전구들이 널브러진 것만 같았고 사방이 그 작은 전구들로 둘러싸인 세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나와 유진이는 그 작은 세상이 우리가 호주로 온 이유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었다.

Vivid 축제 준비로 인하여 몇몇 건물은 이미 파란색이거나 초록색을 띄었고, 그로 인해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는 일과 그 한가운데에서 좋아하는 동생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따듯해지는 순간이었다. 시드니란 도시는 어느덧 우리에게 있어 여행지보다는 일을 하고 먹고사는 삶의 중심지에 가까웠는데, 서큘러퀘이는 그런 우리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이곳이 여전히 아름답다는 하나의 반증과도 같았다.


튀김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검정색 유니폼을 던져버리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마치 어제 갓 도착한 여행자처럼 사진을 찍으며 행복해하는 일. 우리는 이곳에서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인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마치 처음 온 사람들처럼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간 한국인은 통 보지 못했다는 듯이 지나가는 한국인 관광객분들과 서로 즐거운 여행이 되시라며 인사를 건네고, 곧 이곳에 다시 올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집에 가는 발걸음을 선뜻 뗄 수 없었다. 어느덧 시드니는 향수병을 불러일으키는 낯선 도시가 아닌 여전히 새롭고 설레는 일이 가득한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3일 후, 우리는 인도네시아인이자 하우스메이트인 린다언니와 함께 비비드 축제를 다시 찾았다.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을 보지 못했던 우리는 이곳이 관광지였음을 다시 실감하였고, 페리를 타고 지상에선 볼 수 없었던 바다 위에 떠있는 오페라하우스의 야경을 보며 감탄하였다. 원색으로 뒤섞인 무늬를 뽐내며 빛나는 오페라하우스는 마치 바다에 떠있는 무지개색 조개를 보는 듯하였고 버스비와 비슷한 돈을 내고 이런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었다.


노동자와 여행자 사이에는 꽤나 많은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내일이면 아직은 가보지 못한 낯선 곳들을 탐구하는 사람과, 내일이면 늘 그러하듯 이곳에서 분주히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 오늘이 지나면 한동안 이곳을 볼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한 사람과 어느덧 그 장소가 익숙해져 권태로움마저 느끼는 사람까지. 낯선 도시에서 낯선 사람들과 전혀 해보지 않은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 도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몇 시간을 머물러도 아쉬운 이곳을 다시 올 수 있다는 안도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행할 곳이 많이 남았다는 설레임. 그리고 낯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의지하고마는 과정 등.


눈부신 미항과 그 속에서 행복한 사람들 사이로 걸으며, 나는 유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시드니로 온 이유는 바로 이곳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 순간 우습게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이곳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퍽 서운하게 느껴졌다. 서큘러퀘이는 어느덧 내게 매 순간 그리운 장소가 되어버렸으므로.

매거진의 이전글 [D+38] 언니 오빠 결핍증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