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학교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사서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청소년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주로 가정의 불화, 성장, 사춘기의 방황 등을 그린 이야기가 그 시기를 지나온 나에게 맞지 않으리라는 성급한 오판 때문이었다. 소설 <훌훌>을 다 읽고 나서야 내가 그간 청소년소설에 대해 얼마나 얄팍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 책이 왜 대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실감하였다.
주인공 서유리는 자신을 입양했지만 얼마 안 가 떠나버린 엄마 서정희씨의 부고소식을 듣는다. 할아버지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오고 있는 유리에게 서정희씨가 남기고 간 아들 연우가 등장한다. 얼떨결에 초등학교 4학년밖에 되지 않은 연우를 도맡으면서 유리의 삶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고, 훌훌 할아버지와 이 집을 떠나고 싶던 유리의 굳은 결심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소설 <훌훌>은 청소년인 서유리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음에도 주변에 다양한 성인 인물들이 등장하며 자칫 유치할 수도 있는 청소년소설에 깊이감을 선사한다. 입양되었지만 그 입양된 엄마마저 떠나 피 한 방울 안 섞인 외할아버지와 지내는 고1 소녀의 이야기는 당차고 야무진 유리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신파적이지 않다. 극의 결말은 막힘없이 진행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주인공의 성장을 구태여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저 유리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유리는 주변인물로 하여금 조금씩 단단해져감을 보여줄 뿐이다. 놀랄법한 사건들로 전개되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덤덤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제목 <훌훌>은 중의적이다. 2년만 참으면 독립할 수 있다며 일부로 기숙사가 지원되는 학교를 찾아보던 유리는 '훌훌'이 집을 떠나고 싶어 했다. 연우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유리는 모든 것을 애써 외면하며 '훌훌' 떠나기로 한 자신의 다짐을 굳혀본다. 모든 갈등과 의문이 해소되고, 유리가 한 뼘 더 단단해졌을 때 유리는 비로소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것들에 대해 '훌훌'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실체적인 집에서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하고 싶었던 유리는, 자신이 애써 외면한 감정을 직면하며 추상적인 후련함을 느낀 것이다. 실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훌훌 떠나고자 하는 것'의 대상이 옮겨가며 유리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30살이 훌쩍 넘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내가 떠나고자 했던 것은 지난한 환경이었을까 혹은 지난한 나의 마음이었을까.
다만 책 <훌훌> 역시 청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매일같이 리얼한 고등학생들의 대화를 들어서인지, 학교에서 실제 아이들이 거칠게 쓸법한 말들이 소설에서는 매우 유하게 표현되어 극의 몰입이 잠시 방해된다는 것과 '재수탱이'라는 요즘 아이들은 쓰지 않을 법한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단점은 그저 소소하게 취급될 만큼 소설 <훌훌>은 어른들에게도 먹먹한 감동을 줄 것이다. 성인인 주변인물의 고통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그저 극의 전개를 위해 기능적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나니 마치 한 편의 단막극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