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중2병이 고전을 만났을 때

by 사서 유

마고 로비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폭풍의 언덕>은 예고편이 공개되면서부터 혹평이 쏟아졌다. 원작에서는 중동이나 로마니가 연상되었던 마초적인 히스클리프는 천성적으로 눈빛부터 처연한 백인인 제이콥 옐로디가 맡았고, 마고 로비 또한 미스캐스팅 논란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건강하고 진취적인 여성상에 잘 어울리던 그녀의 이미지는 히스테릭한 캐서린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예고편에서 짧게나마 공개된 연출 역시 쨍한 색감과 섹텐으로 점철된 넷플릭스용 팝콘무비를 떠오르게 했다. 원작 팬인 나로서는 펜넬 감독의 <폭풍의 언덕>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황량하고도 안개가 자욱한 나의 언덕은 영화 속에선 그저 다 쓰러져가는 집으로 묘사될 뿐이었다.

이러한 우려를 뒤로하고 순전히 원작의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에머랄드 펜넬 감독의 <폭풍의 언덕>을 관람했다. 예고편은 기우가 아닌 앞으로 영화를 보며 느낄 감상의 복선에 가까웠다. 제이콥 옐로디는 <프랑켄슈타인>에서는 동정심을 일으키는 크리쳐와 몹시 어울렸지만, 마초적이고 파괴적인 히스클리프를 연기하기에는 역시 유약해 보였다. 그가 아무렴 화를 내고 SM플레이를 일삼는 거친 남편을 연기한다 할지어도 그의 처진 눈은 그저 불쌍해 보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캐서린을 연기한 마고 로비 역시 저돌적인 그녀의 이미지와 융합되지 못했다. 원작에서의 캐서린은 폭력을 일삼는 오빠 밑에서 자라 말괄량이 같으면서도 히스테릭하고 제 멋대로인 성정이었지만 마고 로비가 연기한 캐서린은 그녀의 말괄량이 같은 면모가 부각될 뿐이었다. 이 영화가 원작을 각색한 것이 미스캐스팅의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원작의 큰 골자를 따라갔기에 이는 변명이 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영화 <폭풍의 언덕>은 앞서 말하였듯이 원작의 큰 줄기는 이어가되, 제멋대로 원하는 부분만 의미 없이 바꾼 팬픽에 가깝다는 것이다. 힌들리의 패악적인 모습을 아버지로 통일시킨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심지어 캐서린이 에드거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정사를 벌이는 것은 그 둘을 그저 불륜커플로 전략시켜 버린다. 무엇보다 캐서린이 몰래 자위하는 모습을 히스클리프가 보게 되면서 오로지 성적인 끌림으로 촉발된 것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원작을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것이 미디어믹스에서 끊이지 않는 논쟁이라는 점은 알지만, 감독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분명 원작소설을 강렬하게 읽었노라 밝혔다. 척박하고 황량한 공간에서 폭력에 노출된 두 아이가 남매에서 이성애로 변하는 그 시점들을 그저 섹텐으로만 치부한 것이 안타깝다. 원작자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욕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각색이다.

무엇보다 영화의 미술이 기괴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에드거와의 평온한 생활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점이다. 경제적인 풍요와 더불어 유약할지라도 안정적인 성품을 지닌 에드거가 캐서린의 피부를 본떠 만든 침실을 보여줄 때의 괴리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극 중 이사벨라가 괴짜이자 너드로 바뀐 것은 그렇다 할 지어도 그녀가 히스클리프에게서 학대당하며 오히려 그 학대를 즐기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은 원작에서 가정폭력에 노출된 여성을 보여준 것과는 대조된다. 여성의 경제적 능력은 쉽게 허용될 수 없던 시대상이기에 벌어진 캐서린의 오판과 이사벨라의 불행을 모욕한 것에 더 가깝다. 원작소설은 단순히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막장드라마 서사를 지녔기에 문학적 가치가 높은 것이 아니다. 주어진 환경이 진심을 곡해하게 만들 때 벌어지는 불행엔 자립할 수 없는 여성이 할 수 있는 선택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비극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2026년에 개봉한 <폭풍의 언덕>은 원작의 모티브를 가져와 새로운 인물과 제목으로 개봉했어야 함이 옳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육체적 관계를 맺고 안 맺고는 중요한 점이 아니다. 한 번의 섹스일지라도 같은 폭력에 노출된 두 사람이 갖는 반항심, 동질감 등이 녹아들었다면 모를까 영화 속 이들은 그저 욕정에 눈이 먼 불륜에 불과할 뿐이다. 훌륭한 원작을 어떻게 각색했느냐는 기예므로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을 보면 알 수 있다. 원작의 정서와 주제의식을 계승하여 이야기를 확대한 것과 원작의 자극적인 소재를 차용만 한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펜넬 감독의 <폭풍의 언덕>은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팬픽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가깝다. 중요한 것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원전 역시 팝콘무비 같은 소설에 가깝다면 <폭풍의 언덕(2026)>은 몇 세기가 지나도 사랑받는 불멸의 고전이 원작이라는 점이다. 부디 많은 이들이 <폭풍의 언덕>을 영화보다는 필히 원작으로 접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영화의 유일한 장점은 원작을 한번 더 언급하게 했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