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1.25] 책으로 살아남는 것에 대하여

비버리힐스, 더 라스트 북스토어에 가다

by 사서 유

이번 여행의 목표는 분명했다. 다운타운에서 머무는 동안 최대한 많은 볼거리들을 보고 올 것. 휴식과도 같은 여행은 이모댁(오렌지 카운티)에서 충분히 즐겨볼 수 있을 것 같으므로, 나는 시간을 쪼개고 부수어 볼 수 있는 볼거리들을 모두 보고 올 요량이었다. 지도를 보아하니 유명한 관광지는 한데 모여있는 터라 근교 여행을 하지 않는 한, 계획만 잘 짜면 모두 둘러볼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오전 9시부터 시작한 나의 일정 끝에는 건너 띄어서는 안 될 중요한 관광지가 남아있었다.


노을이 저물기 전, 복잡한 헐리우드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은 뒤 서둘러 리프트를 잡아 비버리힐스로 향했다. 비버리힐스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내릴 예정이었지만 목적지를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엉뚱한 곳에 내리게 되었고, 잠시 동안 헤매다 사람들을 따라가니 비버리힐스 간판이 있는 베버리 가든스 공원에 도착하였다. 이미 공원에 도착하였을 당시에만 해도 해가 곧 있으면 어두워질 것 같았고 간판 앞에서는 모두들 기념사진을 찍느라 꽤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지도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들을 따라서 걷다 보니, 어느덧 말로만 듣던 로데오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20200125_164844.jpg 베버리 가든스 공원 (Beverly Gardens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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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명품에 'ㅁ'자도 모르는 데다가, 어느 정도 유명한 브랜드는 이 나이가 되면 알아야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문외한인 나는 사실 로데오거리에 입점해있는 명품관들에 위용에 기가 죽어버렸다. 어느 정도 명품과 친한 사람이었다면 한국에 미처 들어오지 않은 신상이라든지 사기 힘들 세일 품목들을 눈여겨보았을 테지만 내게는 그저 로데오거리는 잘 다듬어진 유럽풍의 골목에 가까웠다. 실제로 로데오 드라이브라 일컫는 이 거리는 상점 하나 허투루 지어진 곳이 없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거리 초입부터 물씬 풍겨, 굳이 매장 안을 들어가지 않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곳저곳을 구경해보기에 충분하였다. 비버리힐스 어때라고 물었던 내말에 먼저 LA을 여행한 친구가 '그냥 고급져. 가보면 알아.'라고 대답한 것이 십분 납득될만한 곳이었달까. 로데오 드라이브 자체가 하나의 명품처럼 느껴졌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구경한 뒤 다시 로데오 거리 초입으로 돌아와, 저녁을 해결할만한 카페를 찾으려던 찰나 내 또래의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혼자서 간신히 셀카를 찍고 있는 나를 보더니 본인이 먼저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청했는데, 속으로는 추후에 1달러를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로데오입구 초입에서 그와 10분 정도 간략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민 2세대인 그의 부모님은 한국인이었고, 그 역시 간략한 문장 정도는 구사할 수 있었다. (그를 보며 잠시 영어회화 초급반 수강생들의 대화를 원어민이 들었을 때에는 이런 기분이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한국에서 여행하는 것이 걱정스럽다고도 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한국인들의(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도권의) 불친절함 때문이었다. 그가 많은 예시를 들지 않았음에도, 그가 느꼈을 감정과 당시의 상황이 대략적으로나마 유추되었는데 요지는 그가 영어로 말을 걸 때마다 때때로 불쾌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영어로 대뜸 말을 걸어오는 그를 보며, 영어울렁증이 있는 사람은 그가 걸어오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으리라. 서둘러 영어를 할 줄 모른다며 손사래를 치고 가던 길을 가거나, 주변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들에게 그의 질문을 토스하는 일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영어에 조금이나마 자신이 있거나 혹은 언어와 상관없이 길을 알려주려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큰 이슈가 아니었겠지만, 왜인지 서로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는 영어가 모국어인 '아시안'이었다. 겉모습으로는 도저히 이 사람이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기 힘든.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마치 도시인들의 대변인이라도 된 양 아마도 영어 때문일 것이라 말했다. 사실, 토종 한국인들이 갖는 '영어'라는 크고 장대한 벽이 어떠한 울렁증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변호하고 싶었달까. 짧은 대화를 끝내고 그는 함께 구경하지 않겠냐며 눈치 없는 나도 알 수 있을 법한 데이트신청 비슷한 것을 걸어왔지만, 당시에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던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거절해버렸다. (지금이라면, 그와 간단한 저녁식사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리고 그날의 일화는 저녁시간 이모부와의 소소한 대화 주제가 되었고, 이모부는 얼핏 들으면 담백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빵 터지지 않을 수 없는 농담을 던지셨다. (이후 프렌즈를 보고 나니, 이모부의 유머는 프렌즈의 챈들러와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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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_171339.jpg 로데오 드라이브 (Rodeo Drive)

어느덧 주위가 모두 깜깜한 밤이 되었고, 나는 계획대로 근처 카페에 들어가 잠시 쉬기로 했다. 카페에 앉아서 좋아하는 라떼를 마시며 오늘 찍은 사진들을 정리한 후 리프트를 불러 카페 앞에서 기다리는데, 우습게도 카페에 들어올 손님의 차량을 리프트로 잘못 오해해 남의 차에 덥석 들어갈 뻔했다. 당시 내 기억으로 그 손님의 차에는 리프트로 오인할법한 사인이 달려있었는데, 본인도 이런 일이 종종 있다며 무안해하는 나에게 소소한 위로를 건넨 뒤 카페로 들어갔다. 이윽고 빨간 사인이 고고히 빛나는 'The Last Bookstore'에 입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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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해리포터 영화에서 볼법한 하나의 커다란 세트장 같기도 했다. 다양한 마법서적들이 판매하며, 종종 하늘 위에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사람들을 보아도 전혀 놀랍지 않을 그런 비주얼이었달까. 직업적인 영향이 큰 편이지만 각국의 서점들을 들어갈 때마다 서너 시간은 거뜬히 보내고 나오는 나 같은 사람들은, 하루 반나절을 이 서점에 투자해도 전혀 아깝지 않을 그런 곳이었다. 서점 중앙으로는 4단 정도 되는 높이의 서가들이 위치해있었고 섹션 별로 북 큐레이션이 되어있어 서점을 찾는 고객들이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도록 용이해 보였다. 물론 정갈하게 책들이 비치되어 있는 대형서점들에 비하여 조금은 복잡한 구조를 띄고 있지만 이곳의 고객들에게 그 점은 큰 단점으로는 다가오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까 단순히 책을 '구입'하는 것보다는 '향유'하는 것에 더욱 가깝다고나 할까.


서점의 2층으로 올라가 보면 책을 가지고 노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 책을 이용한 거대한 장식물들과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공간들이 있었다. 2층은 아티스트들의 개인작업실들이 있어, 조심스럽게 구경하였는데 마치 책을 주제로 한 하나의 테마파크의 들어온 기분이었다. 직업이 사서인 나로서는 이 공간을 보자마자 독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모들에게 권해볼 최적의 여행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막 다루라는 이동진기자의 말처럼, 책은 책장에 고고히 꽂혀있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역할과 소임을 다한다. '책 속에 파묻혀 산다'라는 문장을 이보다 더욱 잘 표현한 공간이 있을까. 책으로만 만들어진 거대한 동굴 속에 들어가 있는 만으로도 책이라면 질색할 사람들에게 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심어주기에 이보다 더 한 곳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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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_193854.jpg The Last Bookstore

이모에게 간략한 생존신고를 마친 후 한 시간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밤 9시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었는데, 그 시각에 LA 다운타운을 혼자 걷는 일은 마치 정글 속을 걸어들어가는 기분과도 같았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마트에 들러 간단한 우유와 샌드위치를 산 뒤 금덩이를이고 가는 사람처럼 껴안고는 숙소까지 앞만 보고 걸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리면서, 이젠 이곳에서 버스도 타겠는데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은 생각에 이내 마음을 접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종종 이 서점이 떠올랐다. 연남동을 걷다가 우연히 작은 서점을 발견할 때, 점점 사라져가는 지역 서점에 대하여 누군가 안타까움을 토로할 때, 정갈한 대형서점이 때때로 부담스러울 때, 이처럼 성공한 지역 서점의 사례들을 먼 나라에 있는 것이 아쉬울 때 등등. 점점 종이책의 시대가 사라지고 전자책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요즘, 도서관계에서도 이 이슈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곤 한다. 무겁기만 한 종이책을 구태여 왜 고집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나 같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장대히 설명하곤 하지만, 편의성에 있어서는 그들의 말을 차마 반박할 수 없다. 서점 라스트 북 스토어는 어쩌면 사라져가는 종이책들의 유언이자, 책이 왜 종이로 남아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책이 데이터가 아닌 실물로 존재할 때의 가치와 종이의 질감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온도에 대하여. 이름처럼 점점 사라져가는 서점들 사이에서 홀로 지역의 마지막으로 남아있을 수많은 곳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