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버리빌딩, 리알토극장,라이트하우스카페, 헤모사비치를 가다
몇 번이고 돌려본 영화 <라라랜드>에서 굳이 한 장면을 꼽아보라면 극 중 셉이 City of Stars를 부르며 헤모사비치 부두를 걷는 장면일 것이다. 행복해하는 사람들 사이를 홀로 걸으며 흥얼거리던 그의 노래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지만 그 모습이 퍽 처연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군중 속의 외로움은 분명 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아라며 읊조릴 수 있을 정도의 시려움이랄까. 3년 전 시드니에서 도착해 내 집 마련에 열을 올릴 즈음, 홀로 늦은 밤 영롱하게 빛나는 시청을 바라보자 그 장면이 절로 떠올랐다. 마침내 수없이 본 그 장면의 배경 속에 서있게 되던 때. 나는 주인공 셉이 머물렀던 몇 배의 시간을 그곳에 머물며 내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City of Starts를 연신 흥얼거리며.
전 날 무서움에 떨며 마트 안에서 공수해온 샌드위치와 주스로 간단한 아침을 해결했다. 난방시설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데다가 밤에 샤워를 할 때면 창문으로 내 실루엣이 모두 보일 정도로 열악했던 에어비앤비의 유일한 장점은 '인테리어가 맘에 들었다'는 것이다. 커다란 창문으로 LA 다운타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고, 방 인테리어 역시 꽤 감각 있던 터라 하루 즈음은 여기 사는 자취생처럼 아침을 차려먹고 싶었다. 물론 요알못인 나로서는 하루 한 끼를 위해서 온갖 재료를 살 수는 없었으므로 레트로 샌드위치로 대신해야만 했지만.
전 날의 무리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오늘 둘러볼 곳을 모두 다 살펴볼 심산이었던 나는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자 그랜드 센트럴 마켓으로 향했다. 유럽 배낭여행 중 처음으로 독일에서 중국식 볶음밥을 맛본 나는, 그 이후 외국을 갈 때면 항상 중식집에 들러 pork pried rice를 먹곤 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역시 아쉬울새라 챙겨 먹었다. 결제하는 과정에서 카드리더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간신히 갖고 있던 현금을 탈탈 털어서 비용을 지불할 수 있었고, 홀로 구석에서 30분 넘게 기다린 끝에 밥을 받을 수 있었지만 콜라와 볶음밥의 조화는 앞서 있던 번거로움을 모두 잊게 해주는 맛이었다. 짜고 투박한 맛임에도 불구하고 어째 이 볶음밥은 외국에 나올 때마다 생각이 나는지. 그랜드 센트럴 마켓에서 생각보다 꽤 시간을 보낸 나는 서둘러 브래드버리빌딩으로 향했다. LA를 오기 전 다운타운에서 갈 수 있는 관광명소는 모조리 찍고 오리라 다짐했던 내게, 불과 도보로 몇 분이면 갈 수 있는 브래드버리빌딩은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이 빌딩은 <라라랜드>만큼이나 내가 좋아하는 영화 <500일의 썸머>의 촬영지가 아닌가.
브래드버리 빌딩은 억만장자 루이스 브래드버리가 건축가 조지 와이먼에게 의뢰하여 지은 건물로, LA의 관광명소 중 손에 꼽히는 곳이다. 이 빌딩은 알고 보니 내가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등장하였는데, 건축물의 양식이 르네상스 양식인데다가 그 구조가 독특하여 많은 영화 촬영지로 쓰이는 듯했다. 사실 이 빌딩은 내부를 들어가자마자, 500일의 썸머에서 어느 장면에 쓰였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는데 바로 톰이 Summer을 지나 Fall을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였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 건물은 꽤 유서 깊은 데다가 진중해 보이기까지 해서,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아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의 톰은 여름처럼 뜨겁다 못해 찌질했던 과정을 겪으며 성숙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보였다. 마치 초록의 여름에서 이 빌딩 내부와도 비슷한 단풍으로 물든 것처럼.
브래드버리 빌딩 내부에서는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웅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빌딩의 사진을 좀처럼 한 장에 담을 수 없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고, 잠깐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곳이라는 생각에 섣불리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빌딩 내부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이 공간을 최대한 눈에 담으려고 애썼고, 복잡한 다운타운 안에서 이 공간은 마치 홀로 해리포터 시리즈 안으로 들어온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근처에서 같이 관광 중인 분들에게 부탁해 사진도 찍으며 아쉽지만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발걸음을 나섰다.
그렇게 서둘러 도착한 (심지어 헤모사비치와 거리상 더욱 멀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떠난) 리알토극장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이곳이 영화 촬영지가 맞았나 싶을 정도로 방치(?) 되어있었다. 인터넷 서치 결과 주류를 판매하는 영화관으로 리모델링하고자 공사 중이라는데, 이 소식을 미리 알았더라면 기대감은 없이 방문했을 터였다. 사실 리알토극장을 목적지로 찍었을 때, 리프트기사님이 목적지가 다 와가자 이 곳이 맞냐고 재차 되물으셨고 나는 극장 바로 코앞에 내렸던지라 저렇게 시금치색의 천막이 뒤덮여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웃프고도 허망한 에피소드를 모두에게 알리고자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켜서 '이게 진짜일 리 없어'라며 사진에 글귀를 함께 올렸다. 물론 공사 중인 것을 미리 알았더라도 나는 돈과 시간을 들여 이곳에서 리알토극장을 내 눈으로 담았을 테지만.
운이 좋게도 앞서 나를 태워주셨던 기사님을 다시 만나 빠르게 헤모사비치로 넘어올 수 있게 되었다. 리알토극장과 헤모사비치는 거리가 꽤 되어서, 가는 동안 어느새 해가 져버렸는데 오히려 영화 속 장면과 비슷한 시간대였기 때문에 차에서 내렸을 때의 그 감동을 몇 배는 더 느낄 수 있었다. 기사님이 센스 있으시게도 라이트하우스 카페 근처에 세워주셨고 나는 해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최대한 영화 속 장면과 비슷한 구도로 카페 뒷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영화에서 본 바로 그 라이트하우스 카페의 네온사인이 내 앞에 있다니. 영화의 스틸컷과 똑같이 찍지 못한 것에 조금 아쉬움이 들었지만 더 늦기 전에 노을을 보고자 사람들을 따라 부둣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축물을 구경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LA여행에서 눈을 감아도 그 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는 장면이 있다면, 바로 헤모사비치 부두 위에서 해질녘과 밤을 모두 보냈다는 것이다. 극 중에서 볼 수 있었던 가로등은 아마도 CG처리가 된 것인지 볼 수 없었지만 부두 위에서 바라본 헤모사비치는 그야말로 아름다웠다는 표현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기억이 잊혀져 더 많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이지 '아름답다'라는 표현 말고는 그 전경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함께 이 전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행복한 말소리들과 노을빛에 차츰히 물들어가는 넓은 바닷가, 부둣가 구석 한가운데에서 버스킹공연을 하는 사람부터 부모님과 함께 놀러 온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까지. 그 어떤 불행한 순간도 이 부둣가 위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 행복함 속에서 나는 다행히도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허전하지 않았다. City of Stars를 흥얼거리던 셉이 느꼈던 적절한 허전함과도 같이. 그저 지금 이 광경이 너무도 아름답고 영화 같아서 추운 바닷바람에 벌벌 떨면서도 이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누군가와 함께했던 천문대에서 본 광경과는 또 다른 감상이 있었다. 함께 이 아름다운 전경을 나눌 이 없어도 홀로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조용히 감상할 수 있는 행복이 온전히 나에게만 허락된 것 같았다.
부둣가 위에서 처음에는 라이트하우스 카페를 보았을 때처럼, 영화 속 장면과 비슷하게 찍어보려 노력하다가 사진으로는 이만큼 담으면 되었다는 생각에 무엇에 홀린 것 마냥 부둣가 끝으로 향했다. 바다가 점점 햇빛에 물들어가는 과정을 눈으로 보아하니 마치 바다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그 자리에서 한참을 그 광경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옛날 어부들은 인어에 홀린 것이 아닌, 바다 그 자체에 홀린 것이니라. '바다가 너무 아름다워서'라는 말이 너무도 상투적인지라 바닷속 위에 사는 신비한 생명체를 만든 것이다. 시드니에서도 몇 번이나 바라보았던 바다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촬영지라는 특별함과, 낯선 도시에 또다시 혼자 왔다는 어떤 대견함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함께 이 풍경을 보고 싶었던 이는 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받아들여야 했던 그 선택은, 시간이 지나 내가 덜 상처받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날 감기가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추위에 벌벌 떨다가, 너무 늦은 시간이 된 것을 뒤늦게 알고는 용기 내어 홀로 라이트하우스 카페에 들어갔다. 내가 여행했던 요일에서는 재즈공연이 아닌 레게공연이 한창이었고, 하필이면 긴 체크무늬 플리츠스커트를 입고 빨강머리 앤과도 같은 차림이었던 나는 라이브7080 같으면서도 핫한 그 분위기에 한참을 쭈뼛이다가 바에 앉아서 조용히 모히또 한 잔을 시켰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이 노는 것을 그저 보았던 것 같다. 내 자리 근처에서 민트색옷을 위아래로 빼입은 할머니가 트월킹을 추시기 전까진.
당시 손님들의 연령대도 꽤 높았던지라, 오히려 20대를 찾기가 힘들 정도였던 레게공연에 유달리 눈에 띄는 한 분이 있었으니 앞서 말한 민트색 옷을 입은 흑인할머니셨다. 나는 사실 또래공포증 비슷한 것이 있어 젊은 사람들의 그 핫한 기운에 다소 움츠려드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나보다 높은 연배로 가득한 그곳에서는 조금은 뻘쭘할지언정 어깨를 함께 들썩이는 정도의 추임새는 부릴 수 있었다. 그렇게 홀로 어깨춤만 추던 그때에, 계속 눈에 시선이 갔던 그 할머니께서 그 누구보다도 현란하게 트월킹을 추셨고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에 너도나도 없이 환호하며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할머니는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농염하게 춤을 추셨고, 나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그 광경에 눈이 희둥그레졌다가 이내 이곳이 노인들도 수영복을 입는 것을 남사스러워하지 않는 외국이라는 것을 깨닫고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니까 할담비로 불리는 지병수할아버지를 처음 보았을 때 젊은 세대의 열띤 환호와 호응같은 분위기였달까. 차이점이 있었다면, 지병수 할아버지는 전국구로 그 매력을 뽐내셨다는 것과 할머니가 춘 춤이 트월킹이라는 정도였다.
모두 다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있던 그 와중에 나 홀로 소녀 같은 옷을 입고 어색하게 박수만 치던 내가 안돼 보였는지 앞에서 젊은 여자분이 별안간 내 손목을 잡아끌어 나를 스테이지에 동참시켰다. 속으로는 '이 옷만큼은 오늘 입지 말걸'이라는 생각을 되뇌었지만 그분께서 나를 스테이지로 동참시켜준 덕에 살면서 처음으로 펍에서 홀로 춤을 추는 경사를 이뤘다. 내 주변으로는 나보다는 연배가 있어 보이는 언니들이 둘러싸고 내가 어색함에 크게 웃으며 몸 둘 바를 몰라 하자 춤추는 것을 알려주기까지 했고, 내 핸드폰으로 나의 그 어색한 모습을 사진에 담아주기까지 하였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별안간 로컬펍에 누가 보아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심지어 10대 같기도 한 (그러니까 그분들의 눈과 그날의 내 복장으로 미루어보자면) 동양 여자애가 홀로 뻘쭘하게 들어와서 함께 참여하고 싶으나 차마 그러지 못하고 주춤하는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을 터였다. 어쩌면 이런 분위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 동행과 함께였다면 안이 어떤지 보았으니 그만 나오자며 발길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 동행이 함께 즐겼수있는 이라면 초반에 어색하던 그 순간을 조금 더 빨리 견딜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동행과 함께 춤을 추는 것과 혼자서 함께 즐기고 온 것은 꽤나 큰 차이가 있었다. 이제는 혼자 펍에 가는 것도 모자라 라이브 7080 같은 분위기에서 춤까지 추고 오다니. 속으로 나는 이제 홀로 못할 여행이 없다며 얼마나 대견해했는지 모른다.
후에 다른 사람들의 글들을 읽어보니 공연시간을 피해서 갔던 사람들이 받았던 인상은 동네 주민들만 이용하는 한산하고 고즈넉한 로컬 펍의 느낌이었다. 유명한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느낌은 잃지 않은 모양이었다. 재즈 공연을 하는 날 조금은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펍에 걸려있는 포스터들도 구경하고 라이브 재즈 공연도 듣고 오지 못한 것은 아쉬움에 남으나, 그날 용감하게 레게 공연의 현장에 홀로 입성하여 춤까지 추고 온 나 자신이 지금도 대견스럽다. 아이러니하게도 LA 여행에 있어 유일하게 핫한 날은 그날이었다.
낮부터 홀로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여행한데다가 별안간 춤판까지 벌이고 온 뒤여서, 늦은 밤 숙소로 도착하자마자 몸이 물이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샤워 후 침대에 누워 오늘 본 광경을 다시 한번 살피며, 혼자 춤까지 추고 왔노라 자랑하는 나에게 반응해 준 친구들에게 답장을 보낸 뒤 오늘 본 헤모사비치를 떠올렸다. 여러모로 지금까지 용기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도무지 안될 것 같아서 급하게 끊었던 LA행 티켓과, 낯선 광경에도 주저하지 않고 들어가 모히또를 시켜 먹었던 오후의 나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