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너하임 패킹 디스트릭트를 방문하다
혹시나 두고 가는 짐이 없는지 모조리 확인한 뒤 건물 로비에서 나와 리프트를 기다렸다. 문밖을 나서기 전,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가는 나를 발견한 청년 한 명이 프런트에서부터 달려 나와 문을 잡아주며 인사를 했는데, 알고 보니 이거 미국에서는 꽤 흔한 일이라더라. 실제로 내가 만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스위트한 편이었고,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싱긋 웃는다든지 본인도 멀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려나가 문을 잡아준다든지의 다정한 매너는 몸에 배어있었다. 고로, 그들에게 내가 눈이 갈 정도로 특별히 이쁜 편이라 벌어진 일은 아니란 것이다. 떨어진 펜만 주워주어도 그와 혼인신고를 상상하는 금사빠들에게는 가히 가혹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시간과 경험의 풍파로 천상 금사빠였던 나는 세상 모든 이들을 경계부터 하고 보는 유형의 사람으로 변해있었지만.)
이모댁을 가는 동안 리프트 기사님과 꽤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국적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중동 쪽이었고 그의 고모였나 이모였나 아무튼 친척의 도움으로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해 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의 나라에서 어느 정도 인텔리였던 것 같고, 그의 일은 컴퓨터 그래픽 쪽이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는 그의 나라에서는 벌 수 없는 시급을 이 나라에서 벌고 있었고, 그러한 점들을 생각하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기회의 땅이 맞는 것 같다고 그가 말했다. 다만 그가 미국으로 이주할 당시만 해도, 이토록 국경의 벽이 높지 않았고 그가 시기적으로 운이 좋았음을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종종 리프트 기사님들을 만날 때마다 조심스럽게 내 이야기를 꺼냈고 한때 이민의 목매었던 내 이야기를 들었던 분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종종 해주시곤 했다. 물론, 모든 유색인종의 미국인들이 이민자가 아님을 알기에 선뜻 물어볼 수 없어 내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던 것이다.
기사님과 한 시간가량을 이야기하면서 내 영어실력이 부쩍 상승한 기분이 들었고, 이모부와 언니를 편하게 볼 수 있다는 이유 모를 자신감을 얻은 뒤 드디어 이모를 만나 뵈었다. 미국에서 법정통역사로 일하고 계시는 이모는, 80년대에 영국으로 혼자 건너가 일을 하시다 지금의 이모부를 만나 미국으로 건너오셨고, 결혼 후 4년 동안 수험생활을 가지신 뒤 법정통역사로 꽤 긴 세월을 일하고 계신다. 90년 대생들 중 친인척들 중 한 명 즈음은 있다는 바로 그 '미국이모'가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알게 모르게 이모의 영향을 꽤 많이 받았고, 본인의 막내동생이신 엄마보다도 조카인 나와 더 친한 이모는 때때로 내게 친구 같은 분이자, 내밀한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몇 없는 어른 중 한 명이시다. 이렇게 말하면 여태 낳아주고 길러주신 엄마가 퍽 서운해하시겠지만 뭐 어떠랴. 어릴 적부터 K-장녀로 길러진 이들은 퍽 공감할 것이다. 우리네 아버지들 마냥 속 이야기를 집에서 할 첫째들은 많지 않을 거라는걸.
9년 전에는 이모와 언니가 실어주어야만 구경할 수 있던 스무 살짜리 풋내기가 비록 운전면허 없어도 리프트를 이용하여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줄 아는 29살이 되어 이모댁을 다시 찾았다. 이모는 내가 이모댁 코앞까지 혼자 찾아온 것에 꽤 대견해하셨고, 이모댁은 9년 전과 똑같이 넓고 쾌적했으며 창가에 비치는 햇살은 집안의 노란 페인트 칠로 인해 더욱 따뜻해 보였다. 이모는 멀리 타국에서 조카가 왔다며 점심을 차려주셨고 이모의 요리는 9년이란 시간 동안 더 맛있어져 있었다. 당시 멋부린다며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갔던 나는 전날 물에 젖은 채 놀이공원을 돌아다닌 여파로 몸져 눕고 말았고 몇 년 만에 뵌 이모께 감기 바이러스까지 함께 선물로 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모는 내가 심부름으로 들고 온 홍삼 중 한 병을 모조리 나에게 먹이셨고 그 덕에 나는 기운을 차리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하루에 최소 10시간은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여행 스타일에 나는 꼭 하루 이틀씩 탈이 나곤 했지만, LA를 그렇게 힘들게 돌아다닌 것에는 후회가 없었다. 이모댁이라는 안정감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다른 여행지에서 앓아누운 것과는 긴장이 풀려 컨디션이 더 최악으로 치달았고 별안간 오랜만에 본 조카의 병간호까지 하시게 된 이모께 죄송했지만 집다운 집에 묵는다는 생각에 여간 편할 수 없었다. 라디에이터도 안되는 데다가 무릎담요만 한 얇기의 이불을 덮고 4일 동안을 지내니 병이 안 들래야 안들 수 없었다. 에어비앤비에서 묵었기에 저렴한 가격에 현지인 다운 기분을 좀 더 느껴볼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집 같지 않았던 숙소와는 다르게 가정집에서 느껴지는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마치 시드니에서 매번 쉐어하우스만 보다가 오랜만에 아무런 쉐어생도 들이지 않는 가정집을 보았을 때의 충격 정도랄까.
이모댁에서 고작 20분 내외 거리에 살았던 C와는 다음날 컨디션이 추스러진 이후에 만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나를 오렌지카운티에서 꽤 유명한 관광지인 애너하임 패킹 디스트릭트에 데려다주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복합 쇼핑몰과 같이 되어있는 곳인데 그중에서도 패킹 하우스는 썬키스트 포장 공장을 쇼핑몰로 변화한 곳이었다. 노란색 전구로 가득한 컨테이너형 쇼핑몰인 이곳은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C와 나는 잠시 둘러보다가 점심을 사들고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나는 C에게 시드니와 캘리포니아는 참 비슷한 것 같다며 이야기했고 한때나마 이민을 꿈꾸었던 내 상황과 지금도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해외에 대한 아쉬움을 그 친구에게 말했다. C는 10년 가까이 이주민으로 산 사람으로서 느끼는 불안감에 대해 말했고 나는 그 말을 이해하기에 별다른 대꾸를 할 수 없었다. 화려한 쇼핑몰 안에서 우리의 대화는 전구의 온도보다는 다소 낮았다.
C와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과 함께 노을이 창문 밖으로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미지근했던 우리의 대화와는 다르게 창문 밖으로 보이는 노을빛은 꽤나 따사로웠다. 지금은 실수로 지워졌지만 비행기 안에서 나는 이날에 대해 이렇게 적었던 것 같다. '장소와 감정은 휘발될지어도 그날의 분위기는 기억에 남을 하루.' C와는 그날 이후로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잠시 만나 가벼운 포옹을 하고 헤어졌고 그 이후로 우리는 어떠한 연락을 나누지 않은 채 그저 한때 알았던 사람으로 소멸했다. 때때로 그날 함께한 사람과 장소보다도 창문으로 그저 보기만 했던 풍경이 잔잔히 기억에 남는 그런 하루가 있다. 9년 만에 찾아간 이모댁을 방문하였을 때 올라다 본 푸른 하늘과, 집으로 돌아온 길 보았던 그날의 노을 같은 그런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