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1.31~2.1]여행의 끝

라구나비치, 새들백교회를 가다

by 사서 유

여행의 마지막엔 아쉬움과 미련만큼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착잡함이 덩달아 따라온다. 한두 번 이 과정을 겪다 보니 여행도 마치 연애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레는 시작과 중간의 권태로움 그리고 어느덧 익숙한 이별까지. 이별을 할 때마다 그 충격과 감정소모가 저마다 달랐듯이 여행도 내게 마찬가지였다. 호주에서 1년 동안 별의별 일을 겪으며 이제는 돌아가가고 싶어 세컨비자를 과감히 포기하고 한국행 비행기로 올랐을 때의 그 시원섭섭함과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가라며 누군가에게 떠밀림을 당하는 심정으로 돌아와야만 했던 이번 여행과는 그 이별의 결이 달랐다고나 할까. 다만 공통점이라면 이 시간이 끝나간다는 것을 절절히 실감하되 차분히 정리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날을 보냈다는 것이다. 비록 호주에서의 1년은 여행이라기보다는 노동자로서의 비중을 무시 못했으나, 마지막 두 달만큼은 내게 그 어느 여행과도 다를 바 없었으므로.

마지막 날과 그 전날만큼은 이모와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별다른 일정을 잡지 않았다. 떠나기 이틀 전날엔 이모와 그저 소소하게 일상을 함께 나누었는데, 그 어느 대단한 관광지를 가는 것보다도 내겐 더욱 소중한 시간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이모와 함께 정비소에 들렀다가 그곳 직원의, 자매가 참 아름답다는 농담에 웃으며 이모가 추천해주신 피자집에서 함께 피자를 먹은 뒤 코스트코에 들러 이 것 저 것을 구경하다가 집에 도착하여 남은 시간을 수다와 함께 보낸 그런 평범하디 평범한 일상이었다.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친구와 만났을 때 나는 여행자가 생활자의 공간으로 들어갔을 때 체감할 수 있는 어떤 안정감 같은 것들을 느꼈다. 나에겐 특별한 이 도시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일상을 보내는 평범한 동네이며 그 사람의 속도로 하루를 보내다 보면 나도 마치 이 곳에서 생활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평소 느긋하게 여행하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격하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으나 나처럼 여행도 일처럼 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반강제적인 느긋함이 몹시 낯설며 반갑다. 나는 이모와 함께 평일 한가로운 오후에서 피자를 먹으며 이제야 제대로 힐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비행기를 예약할 당시 미국에서 아침에 출발하는 일정과 밤에 출발하는 것 사이에서 꽤나 많은 고민을 했다. 미국에서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면 한국엔 일요일 밤에 돌아올 수 있었고 그렇다면 나는 무리 없이 출근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다만 하루의 시간을 모두 아침부터 비행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고민하다 무려 월요일 새벽 5시에 도착하여 곧바로 출근을 감행하는 일정을 세웠다. 그 와중에 또 돈을 아낀다고 인천공항에서 3시간을 넘게 지하철로 캐리어를 끌며 이동할 만큼 무식한 짓을 저질렀지만 이 선택에 대해선 후회가 없었다. 비록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아야 했지만 밤 비행기를 택한 덕분에 여행의 마지막을 여유 있게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


마지막 날엔 친척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 이모와 이모부와 함께 총 다섯 명이서 컨트리 음악이 잘 어울릴 것 같은 한 식당에 들러 브런치를 함께했다. 가게 내부는 마치 킹스맨에서 등장한 스테이츠맨이 들릴법할 정도로 미국 특유의 시골스러움이 잘 표현된 곳이었다. 각자 원하는 음식을 시킨 뒤 담소를 나누며 미국에서 마지막 브런치를 가족들과 함께한 뒤 언니와 가벼운 포옹을 하며 헤어졌다. 언니는 평생을 서너번 볼까 말까 한 친척동생을 위해서 올 때마다 나를 챙겨주려고 노력했는데, 이에 나는 언니한테 고마우면서도 종종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국에서 나고자란 언니는 서툰 내 영어에도 잘 들어주려 노력했고 멀리서 친척동생이 왔다며 시간을 내러 나를 보러 오곤 했다. 언니에게 한국이 꽤나 재밌는 곳임을 알려줄 수 있도록, 그리고 이런 언니의 노고에 나도 보답할 수 있도록 언니가 한국으로 놀러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라본다. 아마 나는 언니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더욱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밤낮으로 영어공부를 하러 애쓰겠지. 영어는 어느덧 나에게 공부를 넘어 외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필요한 언어가 되었다. 문법책에 죽어있는 학문이 아닌 살아있으면서 써먹어야 하는, 그래서 늘 애증같이 품고 사는 것으로.

라구나 비치 (Laguna Beach)

언니커플과 브런치를 마친 뒤 이모와 이모부는 나를 라구나 비치로 데려와주셨다. 라구나 비치는 오렌지카운티 내의 최고급 휴양 및 주거단지가 있는 곳이자, 유명한 관광명소로 이 곳엔 꽤 많은 사람들이 햇살을 쬐며 해변을 걷고 있었다. 스무 살에 처음 미국으로 왔을 때 언니와 이모와 함께 밟아본 라구나 비치를 29살이 되어 이모와 이모부와 함께 오게 되었을 땐 뭐랄까, 여행을 이제야 마무리하는 듯한 감정이 들었다. 하늘은 그 어느 곳보다도 파랬고 날씨도 적절히 따뜻했으며 테라스에 앉아 맛있는 디저트와 커피까지 마시자 이 곳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디저트를 열성적으로 설명하시는 웨이터분을 보고 나는 이 곳에 웨이터분들은 유독 더 친절한 것 같다고 하자 이모부는 팁이 있어서 그렇다며 농담을 던지셨다. 일본인이신 이모부의 농담들은 이모부께서는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때때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와도 같았다. 건조하지만 듣고 나면 빵 터질만한 적재적소의 말 한마디를 그때그때 던지신달까.


따사로운 햇살을 맞이며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바닷길을 걷다가, 거리 곳곳에 있는 갤러리들과 기념품샵에 들러 구경을 했다. 여름에 하면 잘 어울릴 듯한 청량한 색의 목걸이도 이모께 선물 받았는데, 같은 바다여도 시드니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는 제법 달랐다. 가보진 못했지만 미디어에서 본 이탈리아 나폴리와도 비슷한 것 같았고 때때로 시드니에서 보던 넓은 바다가 생각나게 했다. 누가 보아도 아름다울 이 휴양지를 이모가 왜 그토록 사랑하셨는지 알 것 같았고 오렌지카운티가 주는 어떤 여유로움이 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모든 곳곳이 한 폭의 엽서 속 사진과도 같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바다에서 현실로 이만 넘어와야 하는 나의 처지조차도 잊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곳의 풍경이 워낙 아름다웠기에 내가 곧 밤 비행기를 타고 이 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그리 서글프진 않았던 것 같다. 여행이란 잠시 왔다 잠시 가는 것임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하여 이미 체득하고 난 뒤였다.

새들백 교회(Saddleback Church)

그렇게 아름다운 라구나비치를 뒤로하고 이모와 이모부와 함께 세들백교회로 향했다. 세들백 교회는 출석 인수 기준으로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대형교회인지라 무교인 나에게는 이 곳마저 마치 하나의 관광지처럼 느껴졌다. 목사를 준비하는 친구에게 이 사진들을 보냈고 그곳에서의 햇살마저 따사로왔기에 친구의 생일선물을 고르며 그렇게 한참을 구경했었다. 이모와 이모부와 함께 따라 들어간 예배당에서 목사님의 말씀을 영어로 들었는데 사실 한국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영어로 들어야 했던지라 대부분의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듣기만 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무교인 내 주변엔 독실한 가톨릭들이 꽤 있었고 그 연유 때문인지 어렸을 때부터 교회로 출입하는 것에 큰 부담감은 없었다. 그러니까 '내발로 찾아들어가진 않더라고, 이렇게 큰 대형교회 즈음은 한번 들어가서 콘서트 보듯이 말씀을 듣고 오는 것 정도는 괜찮아'의 수준이랄까. 그렇게 마지막 일정까지 모두 마친 뒤에 이모 댁으로 돌아와 한국에서 올 때보다 조금은 줄어든 짐들을 다시 정리하였고 일주일 가량의 여행을 끝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마음의 준비까지 모두 마친 뒤 리프트를 불렀다.


리프트 기사님이 도착하시고 차에 올라타기 전, 이모는 내가 이모 댁 앞까지 스스로 찾아온 것과 공항까지 스스로 가는 것에 대하여 꽤 크게 감동하신 듯하셨다. 이모부는 많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가벼운 포옹과 악수를 나눈 뒤 기사님이 날 공항에 잘 내려주실지 등을 체크하시며 살펴주셨고, 이모부의 그런 우직한 표현방식으로 우리는 이미 충분한 인사를 건넨 것과 다름없었다. 이모와는 다소 뜨거운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고, 내가 차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두 분은 밖에서 나를 배웅하셨다. 처음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로 도착한 LA공항에서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사고 갈 만한 기념품이 없는지 열심히 살펴보았고,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이제 막 확산되기 시작하던 시점이 던 터라 공항의 분위기는 꽤나 엄숙하였다. 출국하며 거쳐야 할 모든 절차를 마친 뒤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물 믿듯이 몰려왔다. 워홀 생활을 청산하고 시드니로 돌아가던 그 비행기 안에선 1년간 겪었던 타지 설움도 무시 못했던지라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희망과 설렘이 있었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미국여행의 마지막 길에선 그저 섭섭함과 서운함이 몰아쳤던 것 같다.

이모께 장문으로 감사했다며 편지와 같은 메시지를 보낸 뒤,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들로 눈물이 쏟아졌다. 당시에 나는 한국에서 운이 좋게도 한국에서 정착하며 잘 살고 있었고, 한국생활도 줄곧 다시 적응하여 큰 불만 없이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드니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겪으며 가치관 차이로 부딪혔던 혼란들, 돌아가기 전의 나와 돌아온 후의 나 사이에서 방황하던 시간들과 그 속에서 내심 기대했던 외국살이에 대한 마지막 동경, 시드니에 대한 그리움과 한동안 금전적인 문제로 오기 힘들 여행에 대한 아쉬움 등. 워홀을 끝내고 미처 정리되고 해소되지 못한 감정을 나는 미국여행을 통해서 게워내고 있었고 심지어는 내가 다시 한국을 벗어날 방도에 대해서도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 궁리는 하루 만에 사라졌지만.


당시 내 친구는 나에게 나는 외국에서 살기 힘든 사람이라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제법 서운하게 들렸고, 나는 천상 한국인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우습게도 내가 30년 가까이 산 곳은 한국이었고 내 가치관과 정체성은 모두 내 나라에 붙들려 있었지만 막상 '너는 천상 한국에서 살아야 해'라는 말들엔 애써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보면 그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것을 그때 내가 알았더라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조금은 덜 울었을까. 어쩌면 그때 모든 감정들을 게워내고 한국에 온 덕에 지금의 내 삶이 평온하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의 나라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고 나는 외국에서 느꼈던 설움과 그들만의 차가움 속에서 따뜻한 한국의 정서를 또 그리워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내 정체성을 좌우하는 나의 직업과 한국어가 없이는 살기 힘든 사람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앞서 말한 무거운 이야기와는 다르게 소소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면, 옆에 있던 아주머니께서 좌석의 높낮이로 여간 불편해하셨고 나는 또 특유의 그 오지랖으로 도와드리다 비행 내내 그 분과 말벗이 되었다. 그분은 남편의 직업으로 미국으로 오래전에 이주하셨고, 손자들이 비자를 신청하여 올 예정이며 둘째아드님 내외는 한국에서의 삶이 좋아 미국으로 건너오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분은 내가 퍽 마음에 드셨는지 누구 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주고 싶으시다며 내 번호를 받아가셨고, 나는 딱히 기대감은 없었고 어차피 이미 사방팔방 팔려진 내 번호를 모르는 이 분께 드린다 하여 큰일이 나겠나 싶어 내 번호를 적어드렸다. 그 어머님에게선 당연히 연락은 오지 않았고 아마도 내 번호가 적힌 종이는 그분의 지갑에 있다가 며칠 이내로 구겨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분과 말벗이 되어 여행을 마무리하며 오늘이 지나면 영영 못 만날 사람에게서 속 시원하게 내 고민들을 토로할 수 있는 시원함을 느꼈다.


그 뒤로 나는 한국에 돌아와 1년간 간간히 여행기를 적었다. 여행의 일정만으로 놓고 보자면 드디어 이 한 편이 마지막인 셈이고, 나는 재개봉하는 라라랜드를 극장에서 보며 우울했다가도 다시 글로 풀어내며 평온한 날들을 맞았다. 그렇게 나는 현실로 돌아와 그 현실 안에서 소소한 행복과 우울을 번갈아가며 살아낸다. 다시 먼 나라로 여행을 갈 계획을 열심히 짜보며, 발붙이고 사는 현실에서 한 발만 벗어나면 여행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며 그 여행길을 부단히 놓지 않으려.